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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Aug 26. 2017

목욕 아파트를 가진 왕이 더러움으로 이름을 날리다?

루이 14세에 대한 오해와 청결의 개념 변화

청결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과 옛날이 같았을까? 사실 청결 개념은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들을 겪으며 조금씩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왔다. 먼저 청결에 대한 개념이 바뀌면 건축은 그에 맞는 기술들이 따라가면서 건물에 적용이 되도록 했다. 건축에서 청결, 위생과 관련된 것은 목욕탕과 화장실로 수도시설, 배관시설이 따른다.

 

1346년부터 5년간 유럽 대륙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0-50%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후 유럽인들의 인식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 것이 바로 '물'이었다.

고대의 로마제국은 로마와 식민지에 공중목욕탕을 설치해서, 많은 이들에게 접근 가능한 시설로 제공했다.

중세시대에도 공중목욕탕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에튀브(étuve)라고 하는데, 이는 더운 공기로 땀을 내는 한증탕이다. 1292년 파리의 인구가 25만 가량일 때, 한증탕이 27개 있었다고 한다.

한증탕 이용 비용이 커다란 빵의 가격에 해당되어 일반 백성들이 쉽게 드나들진 못했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따뜻한 한증탕을 자주 이용했다. 백성들은 돈이 들지 않지만 따뜻하지 않은 강물에서 미역을 감았고.

그런데 흑사병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병균이 사람의 몸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병이 생기는 원인을 장기(瘴氣 : 축축하고 더러운 독한 기운), 즉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악취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1879년 파스퇴르가 세균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지속된다.

이런 이유로 옷을 벗고 더운물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 꺼려했는데, 더운물에 들어가면 몸의 구멍들이 더 커지고, 쉽게 병균이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앙시앙 레짐은 한증탕을 멀리하고, 특수한 경우의 치료요법으로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중세시대의 한증탕 모습. 남녀 혼탕이고, 이곳에는 테이블과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료: BNF Gallica)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는데 물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다 보니, 목욕문화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몸을 청결하게 하는 다른 방법들이 생기는데, 그중 하나가 마른 목욕이라는 것이다. 물에 몸을 담지 않고 마른 천으로 몸을 문질러서 때를 털어낸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피를 뽑는 것도 몸 안을 정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서 루이 14세는 2주에 한 번씩 피를 뽑기도 했다. 사실 청결은 시각적으로 남에게 보여주는 것의 하나 표시였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청결의 신호, 그리고 냄새로 알게 하는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로 제2의 피부라고 불리는 흰색 천의 슈미즈라는 속에 입는 옷이 있는데, 겉옷을 입더라도 슈미즈의 흰 부분이 팔소매에 드러나도록 한다. 하얀 슈미즈를 보여주는 것은 내 몸이 청결한 것을 드러내는 척도였다. 참고로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속옷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슈미즈를 벗으면 완벽한 나체가 되는 것인데, 그래서 슈미즈를 제2의 피부라고 하는 것이다. 

슈미즈는 아마나 면으로 만드는데, 당시에는 무척이나 비싸서, 귀족이 죽었을 때 남기는 유품에 슈미즈가 몇 개나 되는지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즉, 재산 목록에 들어갈 정도로 비쌌다는 뜻.

그래서 왕이나 왕족, 귀족들이 자신의 옷장에 수십 개의 슈미즈를 갖추고, 슈미즈를 깨끗하게 빠는 세탁인의 노동을 지불하는 것은 옷으로 자신의 지위를 차별화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왕은 사냥을 하고 나서, 쥬스뽐(테니스의 전신인 운동)을 하고 나서, 슈미즈를 반드시 갈아입었고, 하루에 5번을 갈아입기도 했다고 한다. 즉 슈미즈를 통해 완벽한 청결을 유지한다고 믿었다. 반면 백성들은 하나뿐인 슈미즈를 일 년에 두 번 정도 빨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화의 또 다른 방법이 바로 더러운 냄새를 없애는 것, 아니 없앤다기보다 감추는 것으로 향수가 발달하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귀한 레몬 나무와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오렌지 나무를 보관하기 위한 오랑주리들이 왕궁에 갖춰진다. 이 나무들은 좋은 향기로 공기를 정화한다고 생각하고, 특히 오렌지는 정력제라고 여겨서 왕이나 귀족들이 정성스레 키운 것이다.

아래는 루이 14세의 건축가 줄 아르두앙 망사르가 설계한 베르사유궁의 오랑쥬리. (자료: Wikipédia)   

  

루이 14세는 평생 목욕을 하지 않은 왕이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이 말 자체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비누로 씻어서 때를 제거하는 목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자주 더운 여름날 강가에서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슈미즈를 소유하고 있었고, 하루에도 여러 번 슈미즈를 갈아입었으며, 자신의 향수 제조자를 데리고 있었고, 왕국에서 가장 많은 오렌지 나무와 가장 큰 오랑주리 건물을 소유했다. 즉, 루이 14세 시대에 그는 당시의 개념으로 가장 청결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루이 14세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된 목욕 아파트를 1671-1680년 베르사유궁에 만들었다. 

물론, 목욕은 오늘날의 개념과 차이가 있을 뿐인데, 청결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유희와 연관된 것이다. 이 목욕 아파트는 자신의 정부인 마담 몽테스팡을 감동시키고 그녀와 관능적 유희을 즐길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목욕 아파트에 들어간 거대한 블록 대리석 욕조는 단일 블록인데, 8 각형 모양, 지름이 3미터가 조금 넘고, 깊이는 1미터가량 된다. 이것을 왕궁 안에서 밖으로 옮기는데만 20명 이상의 노동자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리석 채취장에서 왕궁으로 옮기는 비용도, 대리석을 깎아서 만드는 석공의 임금도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이 욕조의 가격이 파리에 귀족의 저택을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니, 목욕 아파트의 화려함이 이 욕조 하나로 대표되고도 남는다.


왼쪽은 마담 몽테스팡이다. 루이 14세는 그녀를 감동시키려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목욕 아파트를 지었다. 가운데는 마담 몽테스팡을 만났을 무렵의 루이 14세다. 양쪽 손목 가까이 보이는 하얀 옷이 청결의 상징, 슈미즈이다. (자료: Wikipédia / Wikimédia commons)

오른쪽의 도면은 목욕 아파트의 평면이다.(자료:http://720plan.ovh.net/~jardinsd/Chateau/Hardouin/bains/pages/01-PlanB.htm/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번호를 클릭하면 각 공간의 실제와 모형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아파트가 완공되고 4년 후에 마담 몽테스팡은 루이 14세의 총애를 완전히 잃고 왕이 준 특권도 모두 거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베르사유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이 목욕 아파트는 마담 몽테스팡의 아들 툴루즈 백작의 소유가 되었다가,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퐁파두르를 거쳐, 현재는 루이 15세의 딸 빅투와르 공주의 아파트로 복원되어 있다. 

1번 공간은 도리아 전실이다. 도면에 보이는 4개의 기둥이 도리아 양식으로 되어 있다. 

2번 공간은 다이애나의 방 (Salle de Diane)으로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들로 장식되어 있고, 천정은 사냥과 달의 여신 다이애나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서리의 3번 공간은 8 각형 살롱 (Salon octogone)인데, 평면이 8 각형이 아니라, 천정이 태양의 신 아폴로를 주제로 한 8 각형 천정화로 장식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각 달을 상징하는 12궁의 알레고리 조각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옆의 4번 공간은 침대가 놓인 목욕 샹브르(Chambre des bains)이고, 5번 공간은 목욕 카비네 (Cabinet des bains)이다. 

목욕 아파트의 출입은 전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점차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진행되어, 5번의 카비네는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다. 4번 방에는 침대가 놓이고 벽난로가 있는데, 루이 14세 때에는 여전히 몸을 물에 담그고 나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 몸의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를 놓아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쉴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루이 16세 때에도 남아서,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목욕실에도 욕조와 침대가 공존한다.

목욕 아파트는 아래 베르사유궁의 도면에서 본채 오른쪽 윗부분의 노란색 영역이다. 


베르사유 궁의 왕실 거주 영역. 중앙의 본체와 왼쪽의 남쪽 날개, 오른쪽의 북쪽 날개 부분 (자료: http://berdom.skyrock.com)

루이 15세 때부터 계몽주의가 널리 퍼지고, 물에 대한 오해도 점차 해소가 된다. 루이 15세는 왕궁 내의 아파트를 개조할 때마다 목욕실을 꼭 만들었다. 이때부터 지금과 같이 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는 목욕을 하게 된다. 왕궁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초기의 배관 시설도 생기기 시작한다. 이후 루이 16세 때에는 영국에서 들여온 오늘날의 변기, 워터 클로젯이 베르사유궁에 설치된다. 즉, 볼일을 보고 나서 물을 내려 오물을 제거하는 것인데, 변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물을 끌어들이고, 오물이 나가는 배관 설비가 갖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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