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숙의 장례식장에서 아빠는 신문사 부장으로 있는 먼 친척에게 날 소개했다. 난 육개장 뜨던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 버럭 화를 냈다. 이제 그만 좀 하시라고. 그 말은 날 추켜 세우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미련 남은 불쌍한 인생이라는 말이랑 같다고. 그렇게 장례식장은 당숙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한 번, 나의 역정에 또 한 번 싸늘한 분위기가 됐다. 그리고 그 말은 아빠 입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내 수식어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는 서운하다. 죽어라 목매달고 한 것도 아니잖니! 아빠는 네가 한 번 더 도전하길 바랐다."
내가 일반 기업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집에 알렸을 때, 아빠는 축하 대신 문자로 서운함을 표했다. 하지만 그즈음 나는 아빠의 얼마 남지 않은 정년과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가계 지출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사실 그건 모두 핑계고, 무엇보다 기뻤다. 어딘가에서 나를 받아줬다는 게.
아빠에게 PD라는 직업은 썩 멋져 보인 것 같다. 그리고 아빠는 미디어를 전공한 딸이 언젠가 PD가 될 거라 순진하게 믿으셨다. TV 자막으로 채용 공고를 확인한 시점부터, 필기시험, 면접, 최종 발표날까지 모든 일정을 다 꿰고 있으면서도 절대 알은체는 안 한 아빠. 내가 김칫국을 마시고 있을 때 어쩌면 아빠의 김치찌개 냄비는 졸아붙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정치 현안이나, 시사 상식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아빠는 툭하면
“넌 PD 될 애가 그걸 모르면 어떡하냐. 다 알아야지 PD는.”
하며, PD를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결국 딸이 신이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갈 운명이란 걸 깨닫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채 안 걸렸다.
나에게 그 3년은 자괴감, 박탈감, 우울함, 자기혐오,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지원한 일반 기업에 합격했을 때, 나는 합격의 기쁨보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되겠구나 하고.
내가 들어가게 된 회사는 전국에 영업 지사를 둔 제조업 회사였다. 영업이 기초인 회사인 만큼 배정받을 직무와 관계없이 영업 지사 교육이 필수였다. 회사에서는 배려를 해준답시고 나를 고향의 지사에 발령 냈다. 한 달이 넘는 교육 기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 지사장은 오랜 전통이라며 우리 부모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아직 정규 임용이 안 된 상태인지라 나는 그 호의가 고도의 평가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아빠.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얘 가요, PD 준비했던 애예요.”
연이어지는 아빠의 말을 잠자코 듣던 지사장은 묵직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아직 점수 제출 전이면 바꿨을 텐데. 허허허.”
아빠는 지사장의 뼈 있는 농담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같이 허허허 웃었다.
천운으로 바로 전날 지사장은 내 교육 점수를 본사에 제출했고, 나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건 모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고,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지 않았다. ‘PD 준비했다는 말이 대체 거기서 왜 나오는데.’ 부끄럽고, 창피하고, 허망한 마음에 이불을 열댓 번 걷어차도 분이 안 풀려 한참 동안을 씩씩거렸다.
이런 설움이 모여 당숙의 장례식에서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나는,
“솔직히 말하면 저 서운합니다. 기약 없이 PD만 죽어라 목매달기 싫었어요! 아빠가 이제 그만 저를 있는 그대로 응원해주길 바라요.”
라는 말을 삼켰던 것도 같다.
이제는 부사수를 두고 일하는 5년 차 마케터가 된 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 말이 가끔씩 속에서 뜨겁게 끓는다. 그 들끓음이 미련인지, 열패감인지는 잘 모르겠다.열렬했던 꿈을 버리고 자본주의적 플렉스로 자위하는 내게 아빠가 심어놓은 뇌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빠에게 ‘PD 준비한 딸’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에게 ‘PD 준비’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는 알면서도 모르겠고, 모르면서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