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아빠는 나무에 올랐다.(추석 벌초 강행기)
아빠편 Vol.7
나이 듦이 점점 선명해지는 부모님이 안쓰러워, 한식날 부모님을 따라가 성묘를 했다. 주어진 도구는 가지치기 가위, 얇은 톱, 낫. 해결해야 할 상황은 여럿이었다. 한식 직전에 쏟아진 비 때문에 묘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고, 잔디 빠진 묘는 탈모 진행 중처럼 초라했다. 묘 주변의 잡초는 잔디를 깔아뭉갰고, 나무는 하늘을 덮어 그늘을 만들었다. 이끼들은 이때다 싶어 무성하게 자랐다.
혼란한 상황 속에 엄마는 익숙한 자세로 낫을 들어 잡초와 이끼를 베기 시작했고, 아빠는 무너져 내린 묘를 골똘히 바라봤다. 한참 궁리하던 아빠는 꾀를 냈다. 우리는 두툼한 나뭇가지 몇 개를 잘라와 약해진 귀퉁이에 박고 흙을 쌓아 올렸다. 마른 흙이 자꾸 무너지자 아빠는 물을 부어 진흙을 만들어 쌓았다. 주변 잔디를 떠 와 덮으니 감쪽같이 복원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절어 한 숨 돌리고 있는데, 아빠의 톱질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언제 저길 올라갔어?"
나무에 올라 톱질하는 아빠. 선수가 따로 없었다.
"아빠 돈 버는 거 빼고는 다 잘해~!"
익살스럽게 톱질하며 윙크하는 아빠에게 엄지를 날려주었다(묘 안에서 아들의 재롱을 본 할머니, 할아버지도 실컷 웃으셨을 거다). 그렇게 아빠의 곡예(?)가 끝나자 산소에 환한 볕이 들었다. 아빠는 나무에서 내려와 바지에 묻은 나무껍질을 툭툭 털었다. 몸에 익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마 매년 이렇게 해 왔으리라.
그 모습을 본 나로서는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20만 원 정도면 벌초해준대요. 추석 때는 가지 말고 대행 쓰셔. 코로나도 말썽이구."
코로나를 핑계로 아빠가 좀 쉬었으면 했다.
"됐다. 우리 선산은 깊어서 사람도 없고. 내가 예초기 들고 가면 뚝딱이다."
그렇게 아빠는 추석 전 또다시 벌초 길에 올랐다.
아빠가 성묘에 정성인 데는 효심도 효심이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선산에 가족 납골당을 지어서 조상들을 납골당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기 대(代)에는 부모님을 안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장을 하는 자체도 일이지만, 그 보다 유해가 된 부모와 마주하는 일은 참 힘든 일일 것이다. 부모의 묘, 공들여 가꾼 터가 결국 사라지는 걸 보는 심정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빠의 벌초는 힘닿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일은 조상을 향한 마음 이자 잊힐 뿌리에 대한 불안감일 터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추석 당일. 차례상을 올리고 조상님들이 편히 식사할 시간을 드리기 위해 우리는 안방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아빠는 사라질 제사와 묘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차례를 합쳐서 한식날에 한 번 지내는 집도 있다네. 쯧쯧."
"아빠, 이제 제 주변에 차례 지내는 집 거의 없어요. 기일 제사나 챙기지."
"... 그래야 쓰냐. 그게 다 조상들께 정성을 다 하는 건데."
명절에 차례 대신 여행 가는 것은 이제 평범한 일이 됐다. 그 변화 속에 아빠는 묵묵히 제를 올리고 묘를 돌보셨다. 옆에서 엄마가 이런 제사는 우리 대(代)까지라고 거드니, 아빠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내 기일에는 담배 한 개비나 올려줘라."
아빠의 짜증 섞인 그 말이 내게는 'Remember me'로 들렸다.
부모와 조상을 기리는 일. 어떤 방법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점점 선명해지는 아빠의 걱정과 서운한 마음은 모를 수가 없어, 올 추석도 마음 한편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