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가 덜 깨서 말이랑 행동이 좀 어색할 거예요. 수술은 잘 됐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내일은 중환자실로 가실 거예요.”
회복실 의사의 말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침을 흘리는 아빠에게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의사는 자기 말을 안 듣는 걸 눈치챘는지, 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중환자실로 가면 면회 시간에만 만나실 수 있고요, 거참 왜 자꾸 울어요. 수술도 잘 됐는데. 따님이 아버지 걱정 많이 했나 보다.”
의사는 날 효심 가득한 딸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어젯밤의 배짱은 온 데 간데없는 나약한 모습에 화가 나서 운 건데.
어젯밤 아빠는 선생님 눈을 피해 으슥한 곳을 찾아 나섰다.
“아, 아빠 좀. 선생님이 피지 말라고 했잖아요. 큰 수술 앞두고 무서운 줄 모르고 진짜.”
“이게 마지막 담배가 될 수도 있잖냐.”
다 큰 딸한테 담배 망이나 보게 하고. 그의 절실함이 짠하다가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수액걸이는 이미 제 쓸모를 잃고 담배 피우는 아빠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됐을지 모를 그 날을 아빠는 담배를 태우며 마무리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뇌종양 수술의 대가라는 의사에게 수술을 잡고는, 돛대까지 탈탈 피우다니. 생사의 기로에서도 주저 없이 제 마음을 따르는 사람. 가로등 빛에 반사된 그의 머리가 영롱하게 빛났다. 민머리 위로 날아가는 담배연기 도넛. 기가 찼다.
아빠를 간병하는 동안 쓸데없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민머리 환자에 대한 것이었다. 환자 중에서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은 개두술(開頭術)을 앞둔 환자, 그중에서도 멀끔히 면도까지 한 환자는 수술이 코 앞이라는 사실. 지금에야 담담히 말하지만, 종양 절제를 위한 개두술은 위험한 일이었다. 말 그대로 두개골을 열어 수술한다는 뜻인데, 달리 말하면 의식불명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수술동의서를 앞에 둔 아빠는 긴장과 불안을 감추며(실은 매우 티 나게) 간호사에게 부질없는 질문을 했다.
“수술 다들 잘 받고 나오죠? 저만 유난 떨어야 되겄어요? 그쵸? ”
사인을 마친 아빠는 연신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줄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아빠는 입원실의 불이 꺼질 때까지 고마웠다느니, 미안했다느니, 유언 비슷한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해 달라는 말도 없었다. 대신 혹시 도움이 필요하거든 연락하라며 낯선 이름을 알려줬다. 간이침대에 누운 나는 아빠가 알려준 이름과 연락처를 휴대폰에 받아 적었다. 나 역시 아빠에게 힘내라느니, 잘될 거라느니 희망 비슷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유언이 필요한 상황을, 희망이 필요한 상황을 힘들여 외면했다. 우울감이 드리울 때마다 고맙게도 건너 침대의 석션 소리가 적막을 깼다.
해가 뜨자마자 아빠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아빠한테 “쫄지 말라” 말하고는, 막상 수술실 문이 닫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왜 나오는지도 모를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잔뜩 움츠러든 몸을 이끌고 대기실에서 수술 경과를 지켜봤는데, 사실 볼 거라곤 모니터의 [수술 중] 세 글자밖에 없었다. 그 세 글자가 그렇게 무섭고 또 귀했다. 6~7시간쯤 지났을까? [수술 중] 이 [회복 중]으로 바뀌었을 때 언니가 병원에 도착했고, 난 그제야 잠들 수 있었다.
이후 아빠는 회복실에서 중환자실로,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일반실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아빠의 회복과 함께 병원 생활은 점차 잊혔고, 그날 밤에 대해 묻는 가족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씩 그날을 떠올린다. 상상 속에서 아빠는 죽기도 하고, 코마 상태가 되기도 하고, 퇴원은 하지만 정신이 반쯤 나가기도 한다. 여러 시나리오 속에 난 어떤 감정일지,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을 이어간다.
아빠가 죽었다면 유언 하나 남기지 않은 그를 원망했을까 아니면 나 자신을 원망했을까?
낯선 남자는 내 전화를 받았을까? 우리를 도왔을까 아니면 모른 체했을까?
난 이 모든 얘기를 남은 가족들에게 했을까 아니면 편집했을까?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모두 떠올리고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내 행동은 같을 것이다. 어쩌면 아빠는 한 숨도 못 잤을 그날 밤 난 졸기도 했을 것이며, 아빠가 유언 비슷한 말을 하려던 순간 난 돌아 눕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오랜 이유일 수도 있고, 우리 사이에 알게 모르게 생긴 균열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을 그날 밤 모두 들켰다고 생각한다.
종양이란 것은 참으로 끈덕져서 아빠의 뇌에 제 살 길을 또 찾았다.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그새 자란 것이 있으면 레이저 시술로 크기를 줄여 나가고 있다. 정기적인 검진과 시술은 아빠 여생에 숙제 같은 것이 되었다. 그 숙제 검사를 함께 해 나갈 참이다. 그러다 언젠가 그 밤이 또 찾아오면, 그땐 용기 내 물어보려 한다.
그날 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