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여행에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빠편 vol.3
중학생 때부터 뭉쳐 다니는 친구 무리가 있는데, 우린 여름이면 계곡 근처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우리가 처음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실컷 물놀이를 한 뒤 펜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밖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내 핸드폰도 울리고 있었다.
“야야, 나와 봐 봐.”
친구들의 부름에 밖으로 나가니 가족들이 도착해 있었다. 아빠는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들렀다며 치킨, 수박, 과자와 음료수를 한 짐 내려놓고 있었다.
“8명이서 노는데 이 정도는 먹어야 하지 않겄어?”
“헉 이게 다 뭐야. 우리 저녁 먹을 거 다 사놨는데.”
'이게 무슨 귀찮은 일?’을 함축한 표정으로 형제들을 째려보니, 그들은 까뒤집은 눈으로 응수했다. 아빠 등쌀에 못 이겨 끌려왔다는 뜻이었다. 친구들은 군것질거리에 현혹돼 내 속도 모르고 아빠에게 온갖 찬사를 날리고 있었다. 음식만 내려놓고 쿨하게 떠나는 아빠에게 친구들은 환호했다. 그때부터였다. 아빠가 우리 여행에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아빠는 ‘좋은 아빠’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친구들은 간식거리를 얻는 윈윈(win-win)이었다. 아빠의 방문에 한 해 두 해 적응되자, 친구들은 장 볼 때 은근히 아빠가 가져올 몫을 빼기도 했다. 그 사이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아빠의 조달 물품에 술이 등장할 때까지 그 전통(?)은 이어졌다.
실은 아빠와 친구들만 좋았지, 나에게는 무척 신경 쓰이고 귀찮은 일이어서 한 날은 행선지를 안 알려주고 떠났다.
"아빠 이제 취준 때문에 예전처럼 다 못 모여요. 먹을 사람도 몇 없고, 안 오셔도 돼요."
사실 그건 표면상 이유였고, 이제 그만 '애 티'를 벗고 자유롭게 놀고 싶었다. 그렇게 홀가분하게 떠난 여행은 더없이 재밌었다. 한참을 놀고 난 우린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분주히 바비큐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헉, 저거 너네 아빠 차 아니야? 말 안 했다지 않았어?”
오 마이 갓. 차창 너머 장난기 가득 미소 짓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친구들도 동작 그만,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와... 탐정이세요?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사진 검색해서 찾았지(찡긋)."
엄마한테 생존 신고 차 보낸 단체 사진이 화근이었다. 근데 그 사진에는 펜션 간판이며 이정표도 없고 그냥 뒷산만 있는데? 사진으로 검색해서 유사한 지형의 사진을 찾아 추리했단다. 이 지역 토박이로 수십 년 산 짬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친구들은 정말 대단하시다며 연신 박수를 쳤지만 나는 허탈감에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렇게 아빠는 그냥 '좋은 아빠'에서 '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고, 추리력과 추진력까지 겸비한 좋은 아빠'로 거듭났다(퍼스널 브랜딩의 최강자가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도 이 일은 친구들 사이에서 올 타임 레전드 에피소드로 회자된다.
어느새 우리는 하나 둘 직장인이 되었고, 고향에 터를 잡은 친구들은 출퇴근을 위해 차를 샀다. 그즈음부터 우리의 여행 동선은 꽤 멀어지기 시작했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아빠 이제 애들이 차가 생겨서 나 데리러 온대. 그리고 우리 놀러 가는 데도 머니까 굳이 오지 마세요."
아빠는 나를 친구네 집까지 기어이 데려다주셨다.
“아빠가 데려다주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겠다.”
무심히 차에서 내리는 내게 아빠가 건넨 그 말은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부모의 직을 상실하는 순간은, 크든 작든 자식에게 해줄 일이 없을 때가 아닐까 하는. 어쩌면 그 날 아빠는 내 여행을 지원하는 것 이상을 상실했을지 모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무뚝뚝한 아빠는 내 친구들에 대해 시시콜콜 차마 묻지는 못하고 대신 찾아와 봤던 건 아닐까 싶다. 대화로 정신적 지원을 하는 것 보다 물질적 지원을 하는 것에 더 익숙했던 아빠. 우리가 불편할 까봐 언제나 아빠가 급히 자리를 떴지만, 그런 아빠에게 차근히 친구들을 인사 시키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이 지금에는 후회로 남는다.
이제 우리의 여행은 결혼과 출산으로 절반도 안 되는 소규모 여행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여전히 공허한 질문을 던진다.
"아빠 안 가봐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