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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영 Feb 07. 2021

'관노'의 의미

정부지원이라는 이름을 행해지는 요구들...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은 매주 코로나검사를 받는다. 처음 코를 발렸을때.. 너무 아파 일주일간 시름시름 앓기도 했다. 지난달 어느날에는 '만일 시설 종사자가 코로나에 걸려 시설에 피해가 발생하게 되면 그 시설의 지원을 고려하겠다'는 공문도 받았다. 참 어차구니가 없었다. 홧김에 인권위에 제소라도 해야하나..하는 생각도 했었다. 누구는 일부러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는가 보다. ㅠ.ㅠ 


  언제부터인가 '관노'라는 단어가 자꾸 머리 속에서 맴돈다.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우리가 비록 국가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위임받아 하고 있고, 그 때문에 급여를 받고 먹고 산다고 해서 우리가 관노일리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관노 취급을 받고 있다.

물론 모두가 조심하고 또한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에게 집단으로 코로나가 발생하면 그 무서운 집단격리조치가 내려질 것이고, 그 누구도 누구를 어떻게 도와 살릴수 있을지 난처하고 힘겨운 상황이 될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대근무로 가정에 돌아가는 직원에게 신신당부하며 절대 밖에나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것을, 타인을 만나지 말것을 권고하고 또 권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직원 모두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벌써 1년째.. 모두가 그렇듯이.. 

그런데 정말 이렇게 까지 시설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매주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걸까? 어디에 물어보기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결정은 도대체 누구에 의해 결정되는지. 약자를 돌보는 사람들은 착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강자가 아닌 약자를 돌보기 때문에 더 만만해서 그런건 아닌지 많은 생각이 오간다.

하긴 일반학교의 통합학급인 특수학급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번번히 장애아동 부모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장애아동 부모님들이 일반통합학급 교사와 특수교사를 차별적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일반학급선생님께는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지만, 특수학급 교사에게는 하대하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만만하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 지역 봉사모임에 가서 독거노인들을 위해 설명절 음식을 만드는 것을 거들었다. 위원장의 음식 솜씨가 좋아 집에서 맛난 음식을 스스로 해 와서 음식하는 동료위원 뿐 아니라 지나가던 동네 단체관련자들에게도 대접을 하였다. 한참 음식을 하다 보니 도대체 이 일은 마을잔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코로나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마스크를 벗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집에서 만들어온 노란 색의 식혜가 너무나 먹음직 스러워 한잔 마시고 싶었다. 마침 그녀는 커다른 접시에 많은 수의 식혜를 담아 대접하기 위해 나가는 길이었다. 군수 사모를 보며 한잔 마시라 했고, 잠시 마다한 사모는 고맙다며 한잔을 들었다. 그 때 마침 내가 '나두 한잔 마셔도 될까요?' 했더니 위원장은 내게 '저기 있는거 만들어 드세요'한다. 순간 당황했다. 아... 나는 이곳에서 그런 위치였구나를 순간 깨달았고... 너무 창피하고 민망했다. 남은 부침개를 부치며 내내 생각에 골돌했다. 

사회적 지위로 판단한 위원장의 식혜사건은 사실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었지만, 그리고 그런 당사자가 나라는 사실에 조금 당황했지만.. 좀더 생각해 보니 그래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구나를 새삼 알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누구나 식혜를 먹을 권리가 있다. 아니 식혜를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위원장은 자신이 대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대접하고 싶었던 것을 내가 눈치없이 무임승차하려다 실패해서 섭섭해 한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참 씁슬한 경험이다.


  돌아가서.. 

자신의 의사를  혹은 결정을 직접적으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과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나는 '인간의 존엄'은 무조건적인 존엄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렀다. 이유인 즉은 그가 어떤 사회적 배경, 지위, 능력을 갖고 있으며 어떤 조건에 있는 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존엄하고, 존중받을 궈리가 있다는 천부인권론에 기본를 갖고 있다는 결론이다. 우리사회의 수많은 계급과 갈등 구조도 결국 이러한 존엄이 실현되지 못하는데 기반한 것이라 여겨진다. 감정노동자들도 누군가의 우리의 아들 딸이고 형제자매라는 이야기로 접근하는 인간 존엄이 자칫 내 자녀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도 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설득력으로 치환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존중받을 권리를 당연시 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약자들의 인권에 예민하다. 내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 약자로 살아왔고,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교육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다보니 차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내면에 상처를 주는지 알게 되었다.

더욱 인간의 존엄에 예민하고 민감한 환경이 되도록 애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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