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영 Jun 15. 2021

일들이 일하는 풍경

양평슈타이너 학교를 시작하던 날.. 2009년어느 날의일기


  사람들은 자신이 일을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들은 적절한 때와 장소가 어우러져 그 일들 속에서 일이 이루어진다.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긋한 안목만 있다면 삶의 호흡도 조절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묘하게 하나의 일이 과정임을 알게 된 날...   

 2009년...양평에 깃발 꽂다.  
            

  서울에서 태어나 50년 가까이 살았고, 서울을 벗어난 삶이란 독일과 스코틀랜드에서 살았던 6년 정도의 시간을 빼면 서울 토박이.. 그래서 결혼하고 가난하여 단칸 셋방에 살 때에도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여 서울 변두리 변방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며 살았었던 듯... 

  그런데 한 달 전부터 무엇인가 갑자기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결정되더니 그로부터 단 한 주일이 흐르고 나니 50년의 서울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어느새 양평에 깃발을 꽂고 있다. 짐을 옮겨 한 주일을 살다가 어제 서울 잠실에서 모임이 있어 서울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어찌나 진이 다 빠지는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 자동차들, 표정 없는 얼굴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서울을 자신이 사수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도시로 간직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잘난 척하는 나에게 양평의 후배 왈, 

'선배가 언제부터 양평 촌념이라고????' 하며 비웃는다. 만일 내가 젊었을 때 이런 삶을 택해야 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싶은 의구심 또한 들곤 한다. 함께 동행한 20대의 아들은 8시쯤 되면 줄곧 몇 시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8시라고 하면 “정말??  난 11시쯤 된 줄 알았네...ㅎㅎ” 하긴 TV도 없고 화려한 불빛도 없는 이곳이니..

후배이자 은혜 엄마 장차현실의 솜씨.. 고맙다.^^


 그렇게 서울을 벗어난 다른 도시들은 깜빡깜빡 초저녁에도 졸린 눈을 하고 있다. 어쨌든 2년간 온 나라를 찾아다니며 고민했던 터전을 마련하여 양평에 깃발을 꽂았다. 우선, 교실이 5개, 강당 겸 세미나실, 그리고 아담한 운동장까지 있는 곳, 주변 경관은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배울 수 있는 배움터로서 최상의 환경이다. 계곡 따라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앞 개울과 뒤쪽으로 높직한 산을 끼고 확 트인 전망이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곳이듯 매일매일 감탄하며 지내고 있다. 작지만 한국의 캠프힐 운동을 시작하는 의미가 크다. 요즘은 매일 준비된 교사 몇 분과 아이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 터전이 늦게 결정되어 아이들을 모집하는 일이 제일 관건이다.  예정된 입학 설명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러나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 설명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모두 올해 우리 학교에 보내지는 않을 지라도 내년이든, 혹은 그 주변이든 누구에게든 슈타이너 학교(발도르프 학교)를 알리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교식 준비에 들어간다. 작은 씨앗이 대지의 햇빛 한줄기를 타고 살짝 고개를 내밀 듯 그렇게 미약한 발아의 상태지만 언젠가는 그것에 잎이 생기고 튼튼한 줄기를 내고 무성한 한그루의 식물이 되어 꽃 피울 날을 기리며 소박한 깃발을 바람에 맡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