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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Nov 02. 2022

[문학] 여전한 2022, 잠시 멈춤

김영하,「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와 이태원 참사

김영하,「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표지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1999)는 현재의 나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요즘 알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규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들이 한날한시에 이태원에 있었다는 것은 SNS의 과시욕과 관련될 것이고, 신고를 받고도 출동하지 않은 경찰은 절차와 행정 문제와 관련된다. 사고가 난 후에도 그 현장을 촬영하고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방식(유튜브 쇼츠, 릴스 등)으로 SNS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2030 세대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언론의 시도들과 다수의 동조가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이 한국의 사회적 모순과, 늘 자리하던(언제 터질지 모르는) 종말 또는 멸망의 징조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거룩하지만)이 가시화된 것이라고 느낀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정확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설에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규명된 이름과 역할에 따라 쓸모없는 일들에 골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린 일상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 죽음을, 사회적으로는 참사를 가져오고 있다. 일상적인 사소한 선택들은 당장 중요하지 않아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각성과 자각이 필요하다.


‘나’는 아침에 면도기가 부러져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내려가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의 다리를 보았고, 경비는 자리를 비우고 있어서 그냥 출근하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빌려 119에 연락하려고 하나 빌려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가 버스 사고가 나서 버스 기사가 죽는다. 겨우 다음 버스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고, 미스 정이라는 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멈춰 버리고 미스 정과 ‘나’는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엘리베이터 문 틈새로 미스 정을 먼저 올려 주었지만, 탈출한 미스 정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후에 관리자가 와서 겨우 탈출하고, 회사에서 브리핑을 마치고, 초라한 몰골 때문에 경비원에게 쫓겨날 위기를 겨우 면하고, 집에 돌아온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끼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1) 경비를 부르지도 않고 바쁘게 출근하던 사람들은, 결말부에서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며 수십 번 경비에게 전화한다. 눈앞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쳐도 서로를 외면하고 다른 누군가가 구하겠지, 생각하며 책임을 돌리는 데 급급하다. 나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한다. 수많은 10대·20대가 서울 한복판에서 죽었는데 ‘그들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옳은지’ 따위에 집중하고 논쟁하고 싸우는 요즘의 우리들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소설이 1999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절망스러운 지점이다.


‘나’의 노골적인 표현들도, 일상에 몰두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나’는 버스 사고가 나서 버스 기사가 죽은 상황에서, 그저 자신이 버스 카드가 없는 문제로 추궁당하지 않게 된 것이 “적이 기뻤”(104)다고 이야기한다. 또 버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다음 버스에 돈을 내지 않고 타게 된 것에 “쾌재”(106)를 부른다. 죽음을 눈에 담고도, 근대적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이익이므로, 당장 나의 심리적 안위나 경제적 효율을 저울질할 뿐이다. 또 ‘나’는 버스 안에서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에 속으로 분개하지만, 정작 “두고 볼 수가 없”(107)다며 화를 낸 지점은 고작, 여자가 ‘나’를 (엉덩이를 만진 사람이 '나'라고 오해하여) 째려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을 포함한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보다 나의 사소한 안위가 우선시된다.


주변인도 마찬가지다. 사고로 버스 기사가 죽은 것 같다고 전화하면서도, 지금 회사에 갈 수 없으니 박 대리에게 내 업무를 대신하라고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에게도 사고보다 회사 브리핑 따위가 우선이다. ‘나’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성취하려는 그 업무는 ‘이면지 사용의 생활화 방안과 화장실 휴지 절약 방안’에 대한 발표다. 작고 쓸모없는 주어진 문제에 몰두하고, 중요한 사회와 삶의 문제를 외면한다. 일상을 꾸역꾸역, “궤짝 속의 생선들”(106)처럼 살아낸다. 그 부작용으로 옆에서 사람들이 낙오되고 떨어지고 죽어 가는데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 이를 ‘나’와 주변인들, 그 개개인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개인들은 멈출 수 없다. 멈춰 선 사이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오래 멈췄던 사람은 결국 뒤에 남겨져 도태되고 낙오될 테니까.


‘나’의 시련들은 그저 “재수 없는 하루”(107)가 아니라, 보다 총체적이고, 거대한 사회적 문제들이 담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꾸 책임을 오늘 아침에 부러진 면도기로, 엘리베이터에 낀 자기를 두고 가 버린 미스 정으로 돌린다. 국가와 사회, 만연한 삶의 태도나 가치관을 탓하기에 그 ‘적’은 너무나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회사 엘리베이터에 미스 정과 갇히는 장면에서, ‘나’는 자신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점을 들어 미스 정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 이때 신분은 (다른 모든 개인적 특성을 무시한 채) 그 존재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된다. 지위·신분·신용이라는 근대적 명명은 관리의 효율성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에 사람들은 ‘자기 존재’가 아닌 직함으로, 시스템이 편리하게 명명해 버린 이름으로 ‘파악’된다. 초라한 몰골로 회사에 도착하는 ‘나’의 상황과 상태는 무시되고 과장은 그저 “어서 들어와서 보고”(117)하라고 말한다. ‘나’는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 행색 때문에 경비원들에게 오해받고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속한 “자원관리부에게 전화”(119)해서 자신의 직위를 확인하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신원 확인’의 절차를 통해 자기 존재를 사회에 ‘증명’함으로써, 자신이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잠깐의 증명 절차 동안 기명으로(명명된 이름 혹은 역할로서) 증명되고 나면, 다시 익명의 존재로 전락한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 엘리베이터를 열기 위해  틈새로 구두를 끼우려고 한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발을, 이후에는 몸을 틈새에 끼워 넣는다.  장면은 물질과 신체의 혼동을 드러낸다. 사회의 구성품으로 사는 개인은 상품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 자신을 꺼내  경비원을 찾아 자신의 구두를 돌려받으려다가 실패하자, 경비원들이 슬리퍼나 다른 구두를 사서 신으라고 이야기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언제든 대체될  있는 익명의 존재들은, 대체가능한 상품인 구두와 마찬가지 것이다. 그러나 자원관리부를 통해 신원확인을 받는  실패한 ‘ 결국 입사 동기인  대리 덕분에 풀려난다.  대리는 ‘ 자신의 관계를 입증함으로써 ‘ 구출해낸다.  ‘ 도움 요청과 관계 맺기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거부당하지만, 결국 연대와 인연과, 관계를 통하여 구원된다.


1999년이나 2022년이나 상황은 같고 어쩌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끊임없이 심각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휴지의 절취선이 30cm여야 하는지 1m여야 하는지 따위를 논의할 때가 아니다. 무수한 근대적 규정과 규칙과, 또 그것에 목매며 분투하고 몰두하는 우리들이, 그 사소한 무지와 무관심과 외면이, 결국 사회의 커다란 문제들로 가시화되며 터져 나오고 있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삼고 혐오하는 것에 몰두하는 대신, 맞서고 타파해야 할 진짜 ‘적’이 누구(무엇)인지 판단해야만 한다. 더 이상의 허망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파악이 시급하고 절실하다.




1)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문학과지성사, 1999, 103쪽. (이후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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