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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린 Jun 14. 2023

그녀의 덴마크식 '불금'

태우기 보다는, 다만 불과 함께 소중히 보냅니다

덴마크에서의 둘쨋날, 별안간 Eva가 내 방의 문을 똑똑 두드린다.

아직 이 곳이 조금 불편하고 낯선 나는 후다닥 달려나가 방문을 빼꼼하게 연다.

나만큼이나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그녀는 뜸을 들이다 멋쩍게 묻는다.



혹시, 마말레이드 함께 만들지 않겠니?




우리의 작은 집에는 아담한 정원이 함께 딸려 있다. 조그만 테이블과 흔들의자, 그리고 작은 비닐하우스가 있는 이 정원에는 여러가지 식물들이 자란다. 그 중 하나가 이름모를 베리다. 거실로 나와 창 밖을 바라보니 작디작은 동그란 보라색 베리가 잔뜩 맺혀있다.


한적한 금요일 아침, 우리는 그렇게 마말레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마말레이드라곤 자우림의 곡 <오렌지 마말레이드> 밖에 모르는 나로선 생소한 요리지만, 간단히 말해 무른 과일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베리를 따는 일이다. 오히려 다른 무언가를 하자고 했으면 불편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오로지 눈 앞의 열매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없이 몇 분여간 똑똑 줄기 따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 움큼씩 쥔 베리를 대접에 담아놓으니 양이 제법 된다. 흐르는 찬 물에 그들을 깨끗이 씻은 Eva는 내게 한 알 먹어볼 것을 권했다. 톡톡 터지는 식감을 앞세운 베리는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셨다.

내 표정을 읽은 건지 그녀는 작은 냄비에 베리를 쏟아넣더니 나무 스푼으로 설탕을 양껏 퍼넣는다. 냄비 안에 흑설탕이 산처럼 쌓였다. 바닥이 겨우 잠길 정도의 물을 붓고는 불을 올렸다.


눌러붙지 않게 천천히 저어가며 재료를 섞는 방법을 몇 번 보여준 뒤, 그녀는 주걱을 내게 넘겼다.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혹여나 정성스레 수확한 베리를 못 쓰게 만들진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로 빙글빙글 주걱을 휘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글보글 기포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운다.





그녀가 정원에 쏟았던 사랑의 원천


Frederikshøj는 단독 주택이 대부분인 동네라서, 거의 모든 집에 앞마당이 딸려있다. 그래서 울타리 너머로 봐도 어느 집에 가드닝 고수가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36번지에는 들꽃이 무성하게 피어있고, 128번지에는 나무와 잔디가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식이다.


그 중 내가 뽑는 1등은 단연 우리 집이었는데, Eva가 워낙 가드닝을 오랜 취미로 하고 있기도 하고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섬세하며 자연을 좋아하는 성격이 무언가를 정성스레 가꾸기에도 알맞다.

그러나 내가 가장 부러웠던 건, 그녀의 세심함이나 정원보다도, 마당을 가꿀 수 있는 그녀의 여유 자체였다.



Eva는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스포츠 센터에서 수영을 하고 온다. 집에 돌아오면 7시 남짓.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8시 전에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3시 반에서 4시 즈음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일주일 중 하루는 점심을 집에서 해결하고, 또 다른 날에는 재택근무를 하기에 실질적으로는 4일 출근이다.

그 덕에 여름 해가 긴 덴마크에서는 퇴근 후 5시간까지도 오후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녀가 부지런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근무시간이 적으니 가능한 루틴이다.

덴마크의 주당 근무시간은 평균 37시간 정도이다.

최대 45시간까지 초과근무를 할 수 있지만, 야근이나 초근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아니기에 실질적으로는 하루에 7시간 정도 일을 하는 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 69시간 근무'가 화두에 올랐던 우리나라 노동계의 현 주소를 뼈저리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그 삶이 얼마나 아득한 곳에 있었던 건지 더욱 절절히 느낀다.


덴마크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많다.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을 사랑하고, 평안함을 사랑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지만, 그 곳에서는 사랑하는 것들이 전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여름날 저녁 9시의 코펜하겐. 초록이 무성한 골목길와 우리의 작은 정원. 20190802


여유는 '물질적ㆍ공간적ㆍ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를 일컫는다.

마음에 남는 공간이 있어야 기꺼이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정원의 식물들에 쏟는 사랑은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덴마크는 그런 여유를 향유하는 사회다.




코펜하겐의 금요일은 소모적이지 않다


우리는 왜 매주 금요일을 홀라당 태워먹고 있는 걸까?

나 역시 금요일을 아주 많이 사랑하여 매일같이 약속을 잡는 사람이고,

금요일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왠지 헛헛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지만,

사실 먹고 마시느라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리는 금요일에는 남는 것이 없다.

다음 날의 숙취 정도만이 재처럼 버려진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금'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 지리하고 힘들었던 평일에 대해 성대히 보상받고 싶은 마음일테다.

일요일부터 목요일, 마음 한 구석에 뭉근히 자리잡고 있던 내일에 대한 압박을 벗어던질 수 있는 유이한 날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내일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론 뇌어브로 거리가 좀 더 붐비긴 해도, 덴마크의 금요일은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왁자지껄한 술집의 들뜬 소음을 한국에서처럼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은 뒤 좀 더 편히 휴식을 취하고,

기회가 되면 더 많은 가족을 초대해 그동안 갖지 못했던 담소를 나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뿐인 금요일인데, 아깝지 않나?' 하는 의문도 잠시,

생각해보면 이들에게는 월, 화, 수, 목도 똑같이 한 번 뿐인 소중한 하루이다.

금요일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것이다.


'오늘은 좀 힘드네, 집에서 좀 쉬어야지.'

연간 25일의 연차 사용이 가능한, 재택근무 역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이런 발상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휴식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극적으로 평화로워진다.


내일도 적당히 괜찮은 하루일 것이란 믿음, 그게 비록 월요일일 지라도.

그 낙관이 있기에 코펜하겐의 금요일은 여전히 평화로울 것이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Eva는 완성된 마멀레이드를 두 개의 작은 통에 옮긴다.

달고 잔잔한 금요일의 결과물이다.

그녀는 두 개의 통 중 하나를 내게 건네며, 빵 위에 적당히 발라먹으면 맛있을 거라 덧붙인다.


조리기구를 식기세척기에 넣은 뒤 간소한 저녁을 차린 그녀는 마지막으로 꼭 탁자 위 양초에 불을 붙인다.

양초는 덴마크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브제 중 하나고, 늘 그들의 식탁에는 촛대가 놓여져 있다.

가스불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잔잔히 빛을 발하는 촛불을 바라보며 딱 초승달만큼 남은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 역시 그녀의 곁에서 설탕에 절인 베리의 잔향을 맡으며 덴마크식 '불금'을 한 번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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