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마린 Jun 15. 2023

저기, 읽을 수 있는 단어인 거지?

근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6개월을 살면서 내가 배운 단어는 손에 꼽는다.

지금 기억나는 건 'Hej Hej (안녕)', 'JA (네)', 'NEJ (아니요)', 'TAK (고마워)' 가 전부다.

언어 배우기에 게을렀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이 지점만큼은 좀 항변하고 싶다!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 언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악명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뭘 배우든 일단 어떻게 읽는지를 알아야 시작할 맛이 날 것 아닌가?

그런데 북유럽 언어는 뜻을 이해하기는 커녕 소리내어 읽는 것조차 장벽이다.


아무리 말해도 내 울분만 더해질테니 일단 보자.

백문이 불여일견.


배경지식을 죄다 파괴하는 알파벳의 나열 


심지어 덴마크어는 철자과 실제 발음 사이의 괴리도 커서, 우리가 정규교육으로 배운 영어 발음법을 활용해 낑낑대며 읽어봤자 어차피 틀린다.

여기에 æ, ø, å 라는 세 가지 글자도 추가되어 가뜩이나 극악인 난이도를 심히 높여준다.


매일같이 타고 다니던 S-Tog의 역 이름조차 제대로 읽어보질 못한 나. 20190818


이 언어의 벽은 북유럽으로 이주해온 대부분의 비유럽인들이 겪는 고충으로, 이 곳에서 몇 년 가까이 살아오신 분들도 보편적인 발음의 덴마크어로 현지인과 소통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 하셨다.


그래서 어차피 6개월만 살 나는 일찌감치 덴마크어로 더듬더듬 의사소통하는 걸 포기하고, 단어를 아주 멋대로 읽으며 살았다.

위의 문장을 내 식대로 말해보자면 [흐블켄 비둔덜릭 베르덴] 정도가 되겠다.

우스꽝스럽지만, 이것도 이방인으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니 나름 재미있는 놀이처럼 즐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정말 고마워' 는 덴마크어로 'MANGE TAK' 인데, 이걸 나와 한국인 친구들은 '망개떡' 이라고 읽으며 키득키득대는 식이다.



믿을 구석은 영어 실력 뿐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단, 내가 아니고 그들이.

많은 유러피안들이 그러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북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나름 교환학생을 준비하며 토플 점수도 내고 전화영어도 꾸준히 했던 나보다, 외국어를 사용할 일이 딱히 없는 일반적인 덴마크인이 더 자연스러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정말이지, 덴마크의 정규 영어 교육법이 궁금해지는 나날들이었다.


어디에서나 영어 병기가 아주 잘 되어있는 코펜하겐. 20191126


곳곳에서 덴마크어와 영어를 동시에 표기해놓은 표지판 및 알림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덕에 반 년 동안 의사소통 측면에서 답답함은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가끔 Eva와 대화할 때, 식물의 이름같은 지엽적인 단어를 알지 못해 말문이 막히는 정도가 전부였을 것이다.

현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생활 반경으로 했던 내가 그러했다는 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삼국의 언어동맹


북유럽 언어의 또 다른 특징은 인접한 나라들끼리의 언어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는 실제로 서로 비슷한 언어체계를 공유한다.

같은 어족에 속하는 관계라 그런지 3개국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 자국어로 대화를 해도 70퍼센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진입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배워두면 3개국어를 거뜬히 할 수 있는 효율 좋은 언어인 셈이다.


실제로 스웨덴인과 덴마크인이 그렇게 소통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인접한 나라들과 비슷한 언어를 썼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예 같지는 않아도, 발음이 조금씩 다를 순 있어도,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누군가 내게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는데 희한하게 머릿속에서 뜻이 한국어로 자동재생되고, 나는 내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데 중국인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면 참 신기할테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는 모두 한자로부터 파생된 언어라 해도 일단 사용하는 글자가 다 다르고, 경우에 따라 어순에서도 차이가 있다.

물론 일본어의 일부 단어는 한국어 발음과 유사하고,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중국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어는 표음의 측면에서, 중국어는 표의의 측면에서 각자 한국어와 접점이 있으므로)

하지만 그런 배경지식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도 소통이 된다는 건 또 다른 얘기다.

당장 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우는데 들이는 시간, 돈, 노력을 대폭 줄여 그 시간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도 있을테고 말이다.


다만 분명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처럼 육지로 이어져 있는 게 아니니 그 메리트를 백프로 누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더구나 동아시아 3국은 역사적으로도 지금도 여러 이해관계와 갈등으로 뒤엉켜 있으니, 우리가 같은 언어로 논쟁한다면 오히려 더 피곤할지 모르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한글이 아주 좋다.

과학적이고, 아주 많은 어감의 단어들로 섬세한 글을 써낼 수 있고, 독창적인데다,

무엇보다, 배우기 쉽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덴마크식 '불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