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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Nov 30. 2021

제주생활백서

제주로운 생활자를 향한 기록 : 거듭 쏘아 올린 용기

제주에서 먹고사는 일에 관한 글을 쓰며 생각을 다듬고, 나를 뒤돌아보는 일이 잦아진다.  어설프고 서툰 문장으로 채운 글로 나의 경험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 내가 디뎌낸 삶을 남들 앞에 내놓는 일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수록 더 묵묵히 용기를 내어 써내려 가고자 한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재미, 자기 인식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꺼낸 경험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발견하고 넘어선 글쓰기처럼 언젠가 부끄러움을 넘어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게스트하우스는 익숙한 것에서 떠나온 나에게 안식처가 돼주었다. 낯선 공간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떠나 온자들의 공감을 불렀고 그 속에서 나는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크고 작은 추억들은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로망이 되었다. 2015년 당시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무급 스텝은 한국의 하와이, 이국적인 제주도에서 젊은 청춘들이 가장 저렴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군산에서 1년 남짓 첫 캐디 생활을 마치고 동남아 여행을 막 다녀온 나는 호주 워홀을 대신하여 제주로 떠나기로 했다. 인터넷 댓글을 통해 신청하고 전화통화로 간단히 면접을 본 뒤 무작정 약간의 짐을 싸서 중고차를 끌고 제주항을 통해 입도하였다. 


제주항에서 화순의 게스트하우스까지 해안도로를 달리며 중간중간 제주의 경치에 감탄했던 기억이 엊그제의 일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한때 불법과 안전의 사각지대 논란이 되기도 했던 게스트하우스 무급 스텝이 현재는 인식과 고용노동의 변화로 유급 스텝으로 대부분 바뀐 것 같다. 숙식을 제공받으며 대가로 청소와 안내 등의 일들을 돕고, 다양한 게스트들을 만나며 그들과 경험을 나누고, 쉬는 날은 제주를 여행하는 것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스텝의 일상이었다. 

문제는 한참 게스트하우스에서 파티가 유행이었던 시기여서 매일 술파티가 열렸는데 같은 패턴의 접대 아닌 접대와 술자리에 점차 지쳐갔고, 쉬는 날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의 부재로 이어졌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움을 줄 것만 같았던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한계 체감 효용 법칙이 나타났다고 할까. 하지만 그 속에서 자연과 함께하며 느리게 흘러가는 제주의 달콤한 일상과 여유가 주는 효용가치는 커져갔기 때문에 제주에 오래 머물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주의 경험을 한 줄로 쓴다면 제주에서 진행된 '우프' 또는 '키부츠' 혹은 '제주 워킹홀리데이'라고 조금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다. 


오래 머물고 싶은 제주는 "다시는 하지 않겠다"며 박차고 나온 나를 캐디(골프에서 플레이를 보좌하는 사람)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 겪어보니 캐디라는 일이 누군가를 보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서비스 정신의 또 다른 이름인 감정노동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군산에서는 한 달 동안 무급으로 교육을 받고, 다시 한 달의 인턴기간(캐디피의 절반)을 거쳐, 3개월 차에야 제대로 된 밥벌이가 가능했다. 초보캐디는 참 서러웠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일 외에도 골프장의 자질구레한 일들(돌 줍기, 잡초뽑기 등)까지 캐디에게 넘겨지는 곳이었다. 

교육받고 버텨낸 시간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1년 남짓 고된 밥을 먹으며 버텨냈던 시간들이었기에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캐디는 내 어정쩡한 경험치에서 가장 높은 고소득 노동 밥벌이였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감으로 "딱 1년 더"를 외치며 제주의 많은 골프장이 중에 내가 선택한 곳은 미국의 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에 뽑힌 클럽 나인브릿지였다. 타이틀도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일했던 군산 컨트리클럽의 회원제와는 전혀 다른 체계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기숙사 지원, 휴장기간 임금 보장 등의 복지가 좋았는데 그중 지원한 가장 큰 이유는 내 밥벌이의 균형을 실현시켜 줄 3개월 미만의 동계 휴장이었다. 이 좋게도 바로 채용되어 숙식제공이 순조롭게 해결되었고 제주에서 먹고사는 일이 연장되어 기뻤다.


 세계 100대 코스 49위였나, 한참 친환경적인 골프장으로 유명했던 클럽 나인브리지 제주도는 코스가 정말 근사했다. 조선 잔디와 서양 잔디를 밟는 느낌이 다른데 폭신폭신한 양잔디를 밟으며 산책하는 느낌으로 일을 해 나갔다. 아침 공기는 신선했고, 저녁노을은 아름다웠고 가까이에서 보는 노루도 마냥 신기했다. 골프장을 찾는 회원들 대부분 매너가 좋고, 캐디피 이외에 뽀찌(경기나 도박 등에서 이기거나 많은 돈을 획득한 사람이 기쁨과 감사함의 표시로 주위 사람들에게 일정 양의 사례를 하는 )의 부수입도 쏠쏠했다. 나는 항상 초보였고, 내 고객에게서 홀인원을 겪어본 적이 없으나 큰 부수입도 존재한다. 복지도 좋아서 오래 일하는 캐디분들도 많았다. 


캐디는 필드에서 라운드당 4~5시간을 고객들과 같이 보낸다. 긴 시간 동안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 외에 고객과의 소통 그리고 센스 있는 행동과 말이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부족했다. 특히 30~50대의 여성 4백이 두려웠다. 찐 체력과 엄청난 센스, 나는 몸이 하나인데 개개인 맞춤 서비스가 필요한 순간들이 쉴 새 없이 요구되는 느낌이었다. 조금씩 위기를 감지하던 1년이 지나고 적응이 될 즈음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내 등 뒤를 따라왔다. 궂은 날씨처럼 까다로운 고객을 만난 것이다. 캐디라는 직업은 나에게 1년이 최대 한계치였던 것 같다. 


본인의 체력과 필드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에 따라 수입도 달라진다. 나는 하루에 18홀을 도는 4-5시간뿐만이 아니라 백대기라는 대기시간과 준비부터 끝난 뒤의 뒷정리까지의 시간이 적게는 6시간, 기본적으로 8시간에 두 번의 라운딩을 돈다면 13시간 정도 골프장에 머무르는 것이 고역이었다. 돌아오는 당번(경기 진행을 돕거나 정해진 청소)이나 아침에 들어오는 백을 정리하는 일 등등 라운딩 외에도 일이 많았다. 따져보면 당시의 최저시급의 2~3배의 수입이었고, 하루 노동으로 최소 12~30만 원까지 가능했다. 그때의 나는 오늘 돈을 쓰면 내일 벌면 되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캐디 생활에서 돈은 사치를 부르고 점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늪 같은 존재였다. 캐디를 하며 골프라는 운동도 배웠고 좁은 공간의 실내에 카트를 주차하다 보니 주차 실력도 늘었다. 나인브릿지에서는 적당한 워라밸이 지켜졌고 추운 겨울에는 동남아 여행도 장기로 다녀올 수 있었다. 색다른 직업의 세계를 맛보았고 사람이 선사하는 천국과 지옥도 맛보았던 좋은 밥벌이 경험이 되었다고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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