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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Nov 29. 2021

제주생활백서

6년 차의 밥벌이 :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소수를 제외하고 삶에서 먹고사는 일은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임금수준이 가장 낮은 내가 사는 제주는 어떨까?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그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의구심이 많이 드는 요즘, 나 역시 내 미래의 밥벌이에 대해 고민한다. 일상의 행복감을 미루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이곳 제주에 살고 있지만 변하는 사회의 속도에 맞춰 나가기 턱없이 부족한 나를 발견한다. 어디에 살든 자신으로 자신답게 살고 싶은 나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님을, 살다 보니 살아졌던 나의 제주 생활 6년 차 그 밥벌이 경험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기록해두고 싶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밥벌이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 하기 전에, 나의 성향에 대해 먼저 생각 해 본다.

왜 일하는가?

나에게 일은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행하는 생계활동"으로 작은 성취감이 뒤따르는 일을 선호한다. 개개인마다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는 다르겠지만 모두 잘 살기 위함이 아닐까. 내 일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태도와 추구하는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이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중이다.

하고 싶은 일이면서 생계에 지장이 없고, 적성에 맞으면서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 그 일이 소명으로 나아간다면? 아직도 나는 그런 일을 찾는 중이다. 평생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데 그 사람이 나인 것만 같다. 같은 패턴의 반복적인 일(예:하우스키핑)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뿐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편이다.

적게 벌고 적게 쓴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 라는 속담과 제주에서 제일 싼 것은 "삼다수와 인건비" 라는 말은 제주 밥벌이의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큰 기업이 없는 제주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영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자영업이 기업(10인 이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제주의 허름하고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서 사업을 확장하며 번듯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남의 일 만 같다. 나는 많이 버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고, 내 삶과 일상을 즐기는 것에 만족감이 높은 사람이다. 어정쩡한 경험치를 지닌 나로서는 최소한의 밥벌이로 적게 쓰는 것이 제주에서 행복하게 오래 사는 방법이 되었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나의 이상적인 밥벌이 균형 (워라밸)

소소한 일상을 사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나는, 일은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고, 그 균형의 정도는 9:3 이 좋았다.

1년 중 9개월 일하고 3개월은 휴식을 갖는 것, 할 수 있다면 그 3개월을 겨울로 맞춰 동남아에서 보내는 것이 나의 워라밸이었다.

최저시급이 만원이 되는 삶에 가까워지자 프리터 (영어의 `자유로움"을 뜻하는 'free'와 독어의 "노동자"를 뜻하는 'arbeiter'를 합성한 일본의 신조어. 한국에서 프리터의 개념은 시간제·파견·용역·재택 노동자로 일하는 비정규직이나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 준비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라면 밥벌이의 균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간제 노동자는 연식이 되어 갈수록 녹록지 않은 시장이다. 대한민국의 청년 연령의 기준은 35세이다. 제주의 아르바이트 구인 글에는 "35세 미만"이 따라다녔다. 나는 제주에서 3년 반 정도 워라밸(9:3)을 추구했는데 34세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그 균형을 상실했다.  

밥벌이의 훌륭한 자산 : 경험

대학을 다니며 보통의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며 주로 학기 중엔 학과 사무실, 방학엔 편의점, 휴학 땐 스타벅스에서 1년 반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세계여행 중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보낸 나날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와 관광객의 그 어디쯤에 있었고, 다행히 스타벅스 경력은 나를 팀홀튼으로 데려다줬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나는 20대의 마지막에 와 있었다. 국가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내일 배움으로 강원도에서 전통방식의 가구, 제품을 만드는 목공을 3개월 정도 배웠고 자격증도 하나 취득했다. 배우고 보니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목공제품이 참 많았고, 내일배움 취미가 되버렸다. 서른이 되었고, 뭔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남들은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 같았고 서른이라는 무게가 마음속에 자리잡아 나의 사회 진출을 더디게 했다. 다시 외국에 길이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내가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만 서른이 되기 전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고자 했고, 초기 정착금을 벌어야 했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지인에게 무슨 일이 가장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냐고 물었는데, 골프를 취미로 하던 지인이 캐디라고 했다. 그 길로 나는 내 고향 군산에서 캐디 입문 교육을 받게 된다. 한달 뒤 호주로 떠나는 티켓을 손에 쥔 상태였으나 그땐 몰랐다. 캐디는 하루 만에 될 수 없고 또 남의 돈을 버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모든 경험은 내 인생의 자산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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