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6, 세상의 모든 엄마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바다가 보이는 집으로 이사 오고는 온종일 별일 없이 라디오를 듣는다. 듣는다기 보다 틀어 둔다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습관처럼 아침 일곱 시 즈음 라디오를 켜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하루를 산다. 가끔 음악이나 사연에 귀를 기울일 뿐 나머진 생활의 소음 정도로만 여긴다. 보통 Classic FM 93.1을 자주 들었는데 요즘엔 음악 FM 93.9에 늘 주파수가 맞춰져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쩌다 돌린 채널의 곡이 그때의 마음에 딱 맞아떨어졌고 그 뒤로 주파수를 돌리지 않은 탓이다.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일. 당연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도 타인의 성향이나 선택 방식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주로 채널을 고정해 놓고 DJ의 말장난과 취향에 정드는 타입이다.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비어있는 공간을 내가 알거나 모르는(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즐겁고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반가운) 이야기와 음악으로 채우는 것. 그게 내가 가진 라디오의 정의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찹쌀떡 군은 전혀 다르다. 어느 포인트에서인지 순간순간 라디오의 채널을 돌린다. 마치 티브이의 리모컨을 다루듯 라디오의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다 자신이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그제서야 짧게 듣기를 멈춘다. 그리고 또 얼마지 않아 채널은 도르륵 다시 돌아간다. 처음엔 그의 올곧은 취향과 선택을 위한 수고스러운 감행에 내심 놀랐다.
아마 나에게 라디오가 안테나라면 그에게는 주크박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이 빠지는 길인지 들어오는 길인지 먼바다의 끝자락만 보이는 오전과 오후의 경계이자 우리 집에서 가장 평화롭고 고요한 공기가 내려앉는 아윤이와 고양이들의 낮잠 시간. 하루에 쉼표를 긋고 잠시 앉아 라디오를 '듣는다'. 친숙하고 따뜻한 DJ의 목소리가 한 사연을 소개한다.
「DJ 님이 우리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면 엄마가 그 힘으로 2주를 잘 보내실 것 같아요. 신청곡은 엄마가 좋아하시는 곡, 사라 브라이트만의 넬라 판타지아입니다.」 어머님이 외국에서 들어오셔서 2주 동안 자가격리를 하셔야 한다고요. 이 곡이 힘이 되시길 바라며 ***어머님 따님의 신청곡 넬라판타지아 Nella Fantasia를 보내드립니다.
라디오에 음악 신청하는 일은 너무나 흔해 빠졌고 어플로도 보낼 수 있는 요즘엔 더욱 쉽다. 보통은 DJ가 사연을 소개한 뒤 친밀하게 보낸 이의 이름을 부르곤 하는데 그럴 때 사람들은 본명이나 별명, 혹은 핸드폰 끝 네 자리를 남긴다. 라디오 채널을 돌리는 일뿐 아니라 라디오에 자신이 불리고픈 이름을 남기는 데도 각자만의 방식이 묻어나는가 보다. 오늘의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 대신 엄마 이름을 전국에 송출했다. 누구의 엄마라고 사연을 남기는 이는 수도 없이 많았으나 누구의 딸이라는 호칭은 어색할 정도로 신박했다. 엄마가 있으면 딸이 있는 게 당연한데도 누구의 딸이라 불리기 원한 그녀가 이다지도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이유는 뭘까. 그 선선하고 애틋한 감정은 한낱 유행가로 치부했던 넬라 판타지아에 다시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도 가물한 『미션 The Mission, 1986』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불던 오보에 Gabriel's Oboe(넬라 판타지아의 원곡)를 처음 들었을 때 느낀 전율이 일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구의 딸의 한마디로 인해 익숙한 멜로디가 낯설어지고 반짝반짝 새롭게 빛났다.
그 사이에도 바다는 찰랑이며 오고 가고를 반복하고 아가는 소록소록, 고양이들은 둥글게 몸을 말아 잠들었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안테나에 집중하고 간혹 뜨개질을 멈추고 귀를 쫑긋 인다.
넬라 판타지아 Nella Fantasia.
넬라 판타지아는 이탈리아어로 '환상 속에서 In My Fantasy'라는 뜻이다.
이것이 내가 꿈꾸던 환상 아니면 무엇일까. 이 평온하고 다정한 시간보다 달콤한 환상이 또 어디 있을까.
내일이면 찹쌀떡 군이 또 어느 주파수로 바꿀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당분간 같은 DJ, 같은 채널로 귀향할 예정이다. 오늘처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듣는 것도 즐거운 데다 그들 모녀의 사연이 다시 올지도 모르는 이유다. 그러면 또 잘 아는 이들을 만난 듯 반가운 기분이 들 것이다.
쉽지만 가볍지는 않게 바란다.
세상 아래의 엄마와 딸, 엄마와 아들, 알거나 모르는 그들들의 하루하루가 부디 안온하기를.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giusto,
내 환상 안에서 나는 한 공정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Lì tutti vivono in pace e in onestà.
그곳에는 모두 정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들에 대한 꿈을 꿉니다.
Come le nuvole che volano,
날아다니는 구름들과 같이,
Pien' d'umanità in fondo l'anima.
영혼의 바닥에서 인간다움(humanity)로 가득한...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chiaro,
나의 환상 안에서 나는 빛나는 세계를 보았습니다.
Lì anche la notte è meno oscura.
그곳에서는 또한 밤이 덜 어둡습니다.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들에 대한 꿈을 꿉니다.
Come le nuvole che volano.
날아다니는 구름들과 같이...
Nella fantasia esiste un vento caldo,
나의 환상 안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있습니다.
Che soffia sulle città, come amico.
친구와 같이 도시를 향해 불어 들어오는...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들에 대한 꿈을 꿉니다.
Come le nuvole che volano,
날아다니는 구름들과 같이,
Pien' d'umanità in fondo l'anima.
영혼의 가장 밑에서부터 인간다움으로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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