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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y 13. 2024

여기는 내 미래의 무덤

*본태 박물관 내 연못에서 소리로 녹음한 글을 고쳐 옮겨 적었습니다



  연보랏빛 블루투스 키보드와 노트, 펜을 챙겨 물가 옆에 앉았다. 보라와 노랑의 아이리스, 꼬리가 긴 잠자리, 연못 위 수련이 떠오르는 이 완벽하고 찬란한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꼬리깃이 긴 제비가 수면 위를 날고 있는 이곳에서

  나는 무얼 쓸 수나 있을까.


  미로처럼 꺾이고 감추어진 입구에 발을 디디자 초록의 바람이 불었다. 비밀을 품고 바깥 세계를 차단하는, 물의 곡선과 콘크리트의 직선 사이를 유영하는.


  바람이 불지만

  이미 지나간 바람은 다시 불지 않고.


  새의 울음과 물의 파동, 먼 곳의 구름, 무소음. 고요의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물의 바닥에 가라앉기로 결심한다. 여기는 내 미래의 무덤. 깊은 물속에서 숨을 참아 5분 10분 1년 10년 물 밖에 나가지 않기로 한다. 당신은 나를 끌어올릴 수 없고 백 년 뒤에는 더 이상 나를 찾지 못하겠지. 여기는 내가 묻힐 미래의 무덤. 나는 물속에 바람 속에 새의 울음 아래 이울어지다 섞일 테니. 그런데 잠깐. 나는 지금 뭔가를 쓰려고 한 것 같은데. 아주 작은 말들이 스윽하고 나를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하기야 지금 쓰는 것이 중요한가. 애초에 이곳에서 뭔가를 쓴다는 게 가능한가. 줄을 선 저것은 측백나무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나는 여기에 묻힐 것이고 하여튼 수련이, 햇빛을 비쳐 반짝이는 수련이 저기 있을 뿐인데.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소리와 바람,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 피카소의 엄마와 아이(Mother-Child, 1963)를 비롯한 여러 개의 lithograph, 탑에 쌓인 돌, 빚고 녹인 그릇들과 달리의 금빛 옷걸이, 은칠보봉황비녀,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 비오토피아, 들어가지 못하는 방, 음택, 남해의 광대 꼭두, 베개에 수놓아진 名立과 一片丹心,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점과 점과 점.


 두 사람이 지나간다.

 ’백남준. 이름은 들어봤네.‘

 ‘이름 정도만 아는 거지. 그 사람의 작품 세계까지 굳이 알아야 하나.’

 우리는 결국 각자의 세상을 모른 채 살아가겠지만


  오래되고 이름 없는 것들이 있고, 제비도 날고, 알 수 없는 피아노 선율도 흐르고. 나는 다만 그 언저리 어딘가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여기에 묻힐 것인가만 자꾸자꾸 생각하고. 어제 가 본 미술관의 화가는 자신의 스튜디오 앞 배롱나무 밑에 묻혔다던데, 이곳과 일면식도 관련도 없는 나는 어떡해야 여기에 묻힐 수 있을까만, 역시 이 연못에 숨을 참고 들어가 가만히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까만 생각하고. 아니면 그저 어떤 시라도 쓸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이기고 뭔가 하나라도 꺼내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제비는 날고 바람은 불고 늘어진 나뭇가지의 이파리는 흔들리고 나도 같이 흔들리고.


  아마 쓸 수 없겠지. 저기 모조리 져버린 수국처럼 져버려서, 빚진 사람처럼 초조해져서, 이곳에서 나갈 생각을 하면 그저 무너지게 초조해져 버려서.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면 그제야 나는. 이 비워지고 채워진 공간을 벗어나면 깨진 파편을 손에 쥐고 뭔가를 쓰겠지. 지금은 지독한 아름다움에 주저 앉아 있을 뿐이지만 져버렸을 뿐이지만 바람은 불고 제비는 날고. 본래의 형태 본래의 마음 본래의 이름. 존재자체로서 가득차 있는 이곳은 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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