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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02. 2024

안경이 뭐라고


  사람은 두 분류로 나뉜다. 찬 겨울 한참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희뿌옇게 변한 시야를 닦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아침에 일어나 손을 더듬어 지난밤 탁자 위에 벗어 둔 시력을 찾는 사람과 여전히 이불에 파묻힌, 역시나 그렇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with 안경, without 안경. 사람은 하나를 신경 쓰면 그것만 보게 된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타인의 머리만 보게 되고 신발을 살 즈음이면 타인의 발끝만 쳐다보게 된다.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이는 것이다.


  아이가 안경을 쓰게 되었다. 불편하다는 말이 없어 나쁜 줄도 모르다가 영유아 검진 때 양쪽 시력차가 심하니 안과에 따로 찾아가라는 말에 그제야 알았다. 간호사가 숟가락 같은 기구를 눈에 댄 아이에게 이 숫자는 뭘까? 하고 묻자 아이는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숫자가 점점 커져갔음에도 아이는 3인가 8인가 0인가 헷갈려했다. 숫자 말고 그림으로 읽자고 간호사가 얘기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아이는 왼쪽 눈이 나빴다. 왼쪽 눈으로 473ml 텀블러만큼 커다란 숫자를 보고서야 아이는 확실한 어조로 5요! 하고 대답했다. 시력 검사 내내 마음이 들썩였다. 괜찮아,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나중에 찾아간 소아 안과에서 눈이 정말 나쁘다는 말에 울고 난시가 보통 나쁜 것보다 더 나쁘다는 말에 울고 안경을 고를 때도 울고 안경을 쓴 모습을 볼 때도 울었다. 정말이지 울보 엄마다.


  여러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여태껏 아이는 흐릿한 시야로 얼마나 불편했을까. 나는 엄마라면서 왜 그것도 몰랐지. 아이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을까. 그런데 왜 하필 벌써부터 겪어야 해. 그게 전부 다 내 탓 같았다.


  처음 아이가 안경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의 보드라운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아윤아. 나는 네가 비누여도 좋아.

아이는 물었다. 내가 고슴도치라도?

그럼, 고슴도치라도 좋아.

내가 똥이라도?

당연하지. 나는 네가 똥이라도 좋아.

그 말들에는 거짓이 하나도 없다.


  안경을 쓰고 어린이집을 가던 첫날 아이는 걱정했다. 친구들이 놀리면 어쩌지? 나는 놀리는 아이들이 나쁜 거라고, 이건 시력을 위해서 쓰는 것이니 그런 장난을 치는 친구가 있으면 선생님께, 그리고 꼭 나에게 말하라고 했다. 혹시라도 그런다면 당장이라도 그 아이를 찾아가 니가 아냐고, 니가 안경 쓰는 불편함을 아냐고, 너도 그렇게 마음을 쓰다가는 평생 안경을 쓰게 될 거라고 저주라도 퍼부으려 했다. 알면서, 그 어린아이의 호기심 어린 잘못은 조금도 없다는 걸 다 알면서.

  그날 저녁 아이 아빠는 아이에게 후기를 물었다. 아이는 몇몇의 친구들이 신기한 듯 안경을 만지고 빼려고 했다고, 하지만 아이는 '이거 장난감 아니야. 눈이 나빠서 쓰는 거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고 했다. 그 말에도 주책없이 눈물이 났다. 네가 낫네. 네가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네. 기특했다.

 

  항상 말을 쉽게 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그 말이 몰고 올 미래와 나를 엮고 일어날 파장을 잊지 않으려 한다. 아이의 안경 쓴 얼굴을 보며 어쩐지 그런 생각을 다시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속상하나 싶었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안경 쓴 사람의 행복과 평안을 무시하냐고 했다. 안경을 쓰면 인상이 부드러워지고 지적여 보이는 이점이 있다고도 했다. 자주 가는 식당의 사장님은 아이의 안경을 보자마자 자신의 라식 수술을 고백하기도 했다. 진짜 별 게 아닌데, 이건 그저 하나의 불편함일 뿐인데. 가만히 일렁이는 마음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의 불편함보다 처연해지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독였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한 어른이 있다. 그는 곧잘 이렇게 장난쳤다. 너랑 네 동생은 눈이 두 개잖아. 하지만 나는 눈이 네 개야. 여기, 여기. 또 여기 여기(안경을 가리키며). 그래서 나는 뭐든 엄청 잘 봐. 표면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더 깊은 것들까지, 그리고 아주 멀리까지도. 그러니 괜찮아, 불안해하지 않아도. 너는 지금 잘 크고 있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는 잘 알아, 눈이 네 개니까.


  역시나 인간은 두 분류로 나뉠지 모른다. 변하지 않을 것을 두고 발버둥 치는 사람과 그것을 끌어안고도 선선히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으로 전부를 평가하는 사람과 보이는 것 너머, 깊이 침잠한 무언가를 더듬어 알려는 사람. 타인의 고통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사람과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사람.

  늘 하던 고민을 한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고 싶을까. 어제 읽은 <가벼운 고백>이라는 책에 '당신은 당신이 매일 하는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매일 할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것을 보든. 나는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의 집합체일 것이다.


  그리고.

  안경 쓴 아이는 꽤 귀엽다. 내 모든 생각이 비틀대며 쓰러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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