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을 마주하고 앉은 귤빛 저녁
아이는 가만히 앉아 티비를 보고
너는 마른 손으로 연신 무언가를 깎았지
사과를 깎고 단감을 깎고 오이를 깎고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인 듯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내
오르고 내리는 마음을 쓸며
아이 입에 넣어주면서
아는 게 더 무섭더라
살아가는 일은 알아가는 일
아는 고통이 늘어나고 아는 슬픔이 늘어나는
캄캄한 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과를 깎는 맨손을 붙잡는 일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일
기적에 매달리는 것을 허용하는 일
살려주세요
네가 신께 빌 때
신을 모르는 나는 사과 껍질에 빌었다
우리에게 천천히 알아갈 시간을 주면 어떤가요
엄마- 하고 울던 네가
엄마- 하고 우는 아이를 안다가
이제 당분간은 못 보겠네, 쓰게 웃을 때
죽음이 널브러진 거실에서
식탁에 가득 쌓인 속살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그렇게
우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빌었다
가만히 가지런히 제 자리에서
깎고 깎이면서
신과 사과 껍질 사이 어딘가를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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