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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31. 2024

멀거나 가까운 우리들의 환생




식탁을 마주하고 앉은 귤빛 저녁

아이는 가만히 앉아 티비를 보고

너는 마른 손으로 연신 무언가를 깎았지

사과를 깎고 단감을 깎고 오이를 깎고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인 듯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내

오르고 내리는 마음을 쓸며

아이 입에 넣어주면서


아는 게 더 무섭더라


살아가는 일은 알아가는 일

아는 고통이 늘어나고 아는 슬픔이 늘어나는  

캄캄한 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과를 깎는 맨손을 붙잡는 일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일

기적에 매달리는 것을 허용하는 일


살려주세요

네가 신께 빌 때

신을 모르는 나는 사과 껍질에 빌었다


우리에게 천천히 알아갈 시간을 주면 어떤가요


엄마- 하고 울던 네가

엄마- 하고 우는 아이를 안다가

이제 당분간은 못 보겠네, 쓰게 웃을 때

죽음이 널브러진 거실에서

식탁에 가득 쌓인 속살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그렇게

우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빌었다


가만히 가지런히 제 자리에서

깎고 깎이면서

신과 사과 껍질 사이 어딘가를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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