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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Nov 19. 2018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010.3.2

사람을 싫어하는 건 쉬운 일이다. 내 맘에 안 들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금방 싫어, 라고 단정 짓고 만다. 매일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 하나가 난 참 거슬렸다. 단지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녀를 남몰래 미워하고 있었다. 헤드폰을 차고 있어도 그녀가 수화기 너머로 계좌번호를 부르는 소리는, 이웃집 아주머니와의 불필요한 수다는, 왜 이렇게 또렷이 들려오는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볼륨을 올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더 짜증스러웠다.


여느 날처럼 그녀와 정류장에서 마주친 찰나 아차. 씨디플레이어를 두고 나온 것이다. 버스에 오르기 전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을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녀는 억센 몸짓으로 창 측 가까이에 날 더 몰아붙였으므로 나는 몸을 더 웅크려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뒷바퀴 자리는 대체로 2인석이다. 누군가 옆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못한 걸까. 눈을 질끈 감았다. 잠이나 자버리자. 

웬일로 그녀는 조용했다. 슬쩍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한 권의 책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책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차마 펼쳐볼 엄두가 안 난다는 듯 물끄러미.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그녀는 책 제목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보기도 했다. 

순간 나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중년의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가 서점에 들러 부끄러워하며 머뭇머뭇 그 책을 집는 모습이 단번에 떠올랐다. 혹은, 이제는 늙어버린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고 쓸쓸해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 이 책을 건넸을 누군가의 모습도 동시에 떠올랐다. 어느 쪽이든 사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책 표지만 들여다보던 그녀가 첫 장을 펼쳤다. 겨우 책 앞날개를 펼쳐놓고 작가의 이력 역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본다. 끝내 그녀는 본문을 펼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는 좋았다.

그녀가, 자신이 가장 예뻤을 때를 선선히 곱씹다가 문득 용기를 낼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책을 펼쳐볼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싫어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적어도 내겐 너무 쉽다. 그녀가 좋아져 버렸다. 

아줌마, 지금이 가장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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