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요 Apr 14. 2024

청춘이 익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나요?

사전탐방; 안식년에 떠나기 좋은 여행지

2017년 초, 그해 겨울의 추위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해가 바뀐 줄도 모르고 밤낮으로 일했던 나는 '바쁨'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매일 새로 써 나갔다.

오전부터 오후까지는 음향기기를 만드는 스타트업에서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름 아래 실질적인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근무했다. 퇴근 후에는 내 몸만 한(몸이 좀 작긴 하다..ㅎㅎ) 군고구마 기계를 끌고 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 헤매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체감 온도가 영하 10도를 밑도는 맹추위 앞에서는 목도리, 귀마개, 장갑 따위도 함께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얼음장 같은 방한용품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가 군고구마 기계에 가스통을 연결하고 불을 붙이고 나면, 마침내 그 열기에 조금이나마 몸이 녹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추위가 있었는데 바로 '발'이었다. 


사무실 퇴근 전 양말을 3겹씩 겹쳐 신어보기도 했고, 양말 속에 핫팩도 넣어보기도 했다. 안감이 양털처럼 두툼하게 나온 방한용 양말도 사서 신어 보았지만, 발이 깨질 것 같은 느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신발 안에 그것들을 욱여넣고 오랜 시간 서 있다 보니 발 모양이 틀어져 무지외반증으로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그때 나이가 만 24살. 대학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인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에 긴 여행을 가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도전을 위한 패기? 지치지 않는 열정? 아니다, 나의 20대에 그런 것들은 차고 넘쳤다. 그저 '돈'이 없었을 뿐. 군고구마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자리만 잘 잡으면 장사는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 냄새를 맡고도 그냥 지나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 말이 되더라.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마를 싼값에 구해야 한다. 그런데 저렴한 고구마는 맛이 없었다. 맛이 없는 고구마는 귀신 같이 안 팔린다. (겨울철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구마 선별 능력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 자부한다.) 그럼 맛있는 고구마를 사면 되겠..! 맛있는 건 비싸다. 이 불변의 진리에 갇혀 적절한 고구마를 선택하는 데만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꿀고구마를 가져다 둔 날에는 꼭 밤고구마를 찾는 손님이 오고, 밤고구마를 가져다 둔 날에는 호박고구마를 찾는 손님이 온다. 다양한 품종을 준비해 둔 날에는, 아무도 안 온다. 사업은 진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말로 다 못 하고 글로 다 못 적는 우당탕탕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그때의 나는 참, 즐거웠다. 꿈이 있었고, 그 꿈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이 황홀했다. 나의 30대가 무엇하나 마음대로 하기 힘들 줄 알았다면, 하루하루를 더 즐겼을 테지만 미래를 몰라도 행복했을 만큼 나의 청춘은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다. 타지 않을 만큼의 적정한 온도로.


나름의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아무것'조차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아무것'이라도 되기 위해 나는 이동 시간 틈틈이 인강을 듣거나 밤잠을 쪼개서 어학 공부를 하는 기이한 퍼포먼스도 이따금 펼쳐야 했다. 


그렇게 두어 달 정도의 짧고도 긴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나는 이 돈으로 더 이상 일하지 않고 오직 여행만 즐길 수 있는 단 2주 간의 방학을 살 수 있었다. 겨우 2주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인생에서 2주를 온전히 쉴 기회가 과연 몇 번이나 오겠는가. 인생 처음으로 때가 되면 주어지는 방학이 아닌 내 손으로 만든 방학을 즐길 기회가 왔다. 그렇게 나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른, 안식년을 갖기로 했습니다> 1화부터 보기

➡️ https://brunch.co.kr/@blanket/22

서른, 안식년을 갖기로 했습니다.서른, 안식년을 갖서른, 안식년을 갖기로 했습니다.기로 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해방일지, 이게 맞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