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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완벽주의“라는 말이 불편한가요?

마음 안의 두 개의 목소리


얼마 전 SNS에서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며 누군가 격하게 반응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게으르면서 어떻게 완벽주의냐?”, “그건 핑계일 뿐이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듣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이 표현에서 자기합리화를 본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스스로를 ‘완벽주의’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 같아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또 누군가는 그 말이 자기연민에 빠질 구실로 보이기도 한다. “어차피 완벽하지 않으면 못 하니까 안 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변화와 책임을 회피하는 정당화로 들릴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은 단지 표현 하나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노력’과 ‘성과’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미루는 사람’,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늘 “의지 부족”, “게으름”, “노력 부족”이라는 낙인이 붙는다. 그 속에서 ‘완벽주의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마음’은 쉽게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자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은 어떤 이에게는 위로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자기와의 충돌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반응이 다르지만, 그 반응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반응 안에 있는 마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불편하다면 그 표현이 건드리는 ‘내 안의 어떤 감정’에 대한 반사작용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나의 과거 실패를 떠올리게 하거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무력감을 상기시킬 수도 있다. 또는, 내 주변 누군가가 그 말을 핑계로 반복해서 책임을 회피한 경험이 있다면, 그 말 자체에 이미 감정이 덧씌워져 있을 수 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에 대해 조금 더 편하게 바라보길 바라며, 글을 덧붙여 본다. 상담의 장면에서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실제로 자주 만나는 내담자의 한 모습이다. 이 말은 오은영 선생님의 설명 이후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 이유는 ‘게으름’이라는 표면 아래에 숨겨진 완벽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들춰냈기 때문인 거 같다.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무조건 나를 비난하지 않아도 된다는 ‘다른 시선’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변화 없는 자기정당화로 이어질까 봐, 또는 ‘성장’이라는 이름의 노력을 방해할까 봐 경계심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어쩌면에서는 방송에서 과정이 생략되어 누군가 반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겉보기엔 미루고, 시작도 못하고, 의욕 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하지 못할 바에야 아예 시작하지 않겠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실패에 대한 과도한 공포,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주저하는 마음, 완벽하지 않으면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내면의 기준이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이렇게 못하니 ‘ 스스로를 자책하고 다그치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선다. 멈춰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너무 잘하고 싶어서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은 실제로 모순적인 단어인 것이다. 해야 한다는 걸 안다. 머릿속 계획은 이미 완벽하다.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시작은 고사하고, 마음만 복잡해진다.


글 속에서 느끼셨겠지만 이들은 대부분 아주 높은 기준을 갖고 있다. “제대로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해.” 하지만 그 기준에 못 미칠까 두려워 아예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게으른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기대에 질려버린 상태라고 이해하는 게 맞다.


결국 그럴수록 내면에서는 더 비난이 거세진다.

“그렇게 해서 뭐가 되겠어.”

“이 정도도 못하는 내가 싫다.”

하지만 이 비판의 목소리는 더더욱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이렇게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은 단지 새로운 성격 유형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상담사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마음의 모순을 드러낸 용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표현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그래 너는 그냥 그래도 돼”라고 넘어가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게으름처럼 보이는 그 행동’ 뒤에 있는 마음을 먼저 이해한 후에,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상담사는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발 내딛게’ 돕고자 하는 것이다.


게으른 완벽주의는 이해받고 머무를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천천히 걸어 나올 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이해 그다음은 작은 실천이다

이들에게는 단순한 “할 수 있어”보다는, 구체적인 심리적 전략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접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1. 목표를 ‘완벽’ 대신 ‘진행’으로 바꾼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전제는 시도 자체를 막는다. 대신 ‘조금이라도 해보자’, ‘5분만 해보자’는 식의 진행 중심 사고가 필요하다. 이는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2. 작업을 쪼개고, 기준을 낮춘다

예: “보고서 완성하기”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서론 문장 한 줄 써보기”는 시도할 수 있다. 완성보다 ‘착수’에 초점을 맞추면 마음의 부담이 줄어든다.


3. 내면의 비판적 목소리를 인식하고 중단한다

“이것도 못 하다니”, “이럴 거면 하지 마” 같은 자기비판은 오히려 행동을 막는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 멈추고 “나는 지금 배우는 중이다” 같은 자비로운 말을 훈련한다.


4. 나를 평가하기보다, 과정에 주목한다

성과가 아닌 ‘시도한 나’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오늘은 조금 움직였다”는 자기 인식은 다음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의 성장환경 등의 배경정보에 따라 중요시할 내용이 달라지겠지만 나는 이 중 3번 ‘내면의 비판적 목소리를 인식하고 중단한다 ‘ 를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게으른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주 엄격한 내면의 목소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것도 못 해?”, “이럴 거면 시작하지 말지.”

이런 말들은 겉으로는 나를 몰아세워 일하게 만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꾸 움츠러들게 만들 뿐이다.


이 목소리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기준, 혹은 실패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서 온다. 문제는 이 목소리를 ‘현실’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내면의 목소리를 다양한 이론으로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가 교류분석(Transaction Analysis, TA)이다. 이 이론은 사람의 자아 상태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 부모 자아(Parent)

• 어른 자아(Adult)

• 어린이 자아(Child)


이 중 부모자아는 비판적 부모 자아와 양육적 부모자아로 나누어진다.


1. 비판적 부모 자아

• 엄격하고 판단적인 목소리

• “왜 이걸 아직도 안 했어?”

•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 기준을 세우고 책임감을 주지만, 너무 강하면 자책과 위축을 만든다.


2. 양육적 부모 자아

• 따뜻하고 돌보는 목소리

• “천천히 해도 괜찮아.”

• “이만큼 한 것도 잘한 거야.”

• 위로와 안정감을 주고, 나를 다시 일어서게 도와준다.

비판적 부모 자아(Critical Parent)는 내가 어릴 때 외부로부터 들은 말과 태도 특히 엄격하거나 평가적인 메시지가 내면화된 자아 상태다.

“왜 이것밖에 못 해?”, “제대로 해야지, 그럴 거면 하지 마” 같은 말들이 반복적으로 내 안에서 울려 퍼질 때, 이는 내 ‘현재’가 아니라 내 안에 내재된 비판적 부모 자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문제는 이 목소리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위축시키고 시도를 차단한다는 점이다. 즉, ‘완벽하게 못 할 거면 하지 마’라는 메시지가 ‘게으름’처럼 보이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건 이 비판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그 대신 나의 또 다른 내면, 양육적 부모 자아(Nurturing Parent)의 자비롭고 온화한 나의 목소리를 키워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균형이 핵심인 것이다. 너무 비판적이면 스스로를 괴롭히고, 너무 양육적이면 현실 회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정도면 괜찮아.”

“오늘은 힘들었으니 조금 쉬어가자.”

“한 걸음만 내디뎌도 잘한 거야.”


이런 말은 처음엔 어색하고 약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내 안의 비판자가 강해질수록, 더 자주, 더 의도적으로 따뜻한 나의 목소리를 불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 안의 양육적 자아를 의식적으로 불러내고, 훈련하고, 일상에 적용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게 곧, “내가 나를 따뜻하게 돌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 연습이 바로 ‘게으른 완벽주의’를 이해하고, 넘어서는 심리적 기술이 된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처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 순간이, 이미 변화의 시작이니까.


오늘의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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