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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까야 Nov 20. 2020

제철은 제 철이다.



그대, 좌절했는가?

친구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그대만 잉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잊지 말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다소 늦더라도,

그대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를 들라.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中

‘너라는 꽃이 피는 계절’, 김난도



기억한다. 한여름에도 에어컨 냉기가 수험서 사이사이로 가득 배어든 독서실에서 시와 함께 엉엉 울었던 날을.

그해 1월, 난 시험에 떨어졌다.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던 겨우 0.8점. 0.8점.. 0.8점... 수백 번 되뇌어봐도 현실은 그저 불합격일 뿐. 면접에서 조금만 덜 버벅거렸으면 달라졌을까? 영어 챈트와 재기 발랄한 율동으로 면접관의 시선을 사로잡았더라면?


왜 늘 나는 내가 생각한 열심히 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까. 왜 남들처럼 약삭빠르지 못한 걸까. 초봄에 피는 매화는 아니어도 봄에 피는 벚꽃 정도는 돼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누리지. 도대체 나의 계절은 언제 올까. 반수 학원 출신이기도 한 나는 시험 직전에는 매일매일 울면서 공부를 했다.


희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5년 뒤쯤엔 ‘아프면 환자가 맞다.’, ‘아프니까 청춘은 아니다.’ 등의 말로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청춘의 아픔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미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느 정도 동의는 하지만 그래도 ‘너라는 꽃이 피는 계절’의 문구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위안을 준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지겨운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먹먹함과 ‘다시 하면 될까?’ 나를 믿지 못하는 불신보다 ‘나만 또 뒤처졌다’는 불안감이었다.


제철 과일 마냥 사람에게도 통용되는 제철이 있는 것 같다. 너 지금 공부 안 하면 커서 후회한다,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까지 이어지더라, 졸업 언제까지 미룰 거야, 우리 나이면 연봉 천은 돼야 하지 않냐, 승진 준비는 일찍 시작해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해, 내 친구 올 초에 전세 끼고 산 집  8개월 만에 1억 올랐대 나도 진작 투자해볼걸, 아이는 낳을 수 있을 때 빨리 낳아 나중에 체력 떨어지면 키우기 힘들어.


그다음은 황혼이혼 장려쯤 되려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정한 사람은 없지만 나도 모르게 끄덕이는 그 기준에선 말이다. 주변 가까운 이들의 근심, 걱정, 자랑, 조언들이 내 안에 쌓이고 쌓여 언제나 노력해도, 제철을 지나도 늘 한참 못 미치는 내가 된다. 그렇게 오늘도 불안해진다. 제철 따라 산다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그 제철이라는 기준, 조건, 정도는 누가 정한 걸까? 과연 사회가 정한 제철 인간처럼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몇 명이나 된다 해도 제철 맞춰 산들 꼭 행복할까? 나는 신선식품도 아닌데.





운이 좋았던 건지, 지난날에 대한 정신 승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2년 더 길어진 수험 기간은 타인의 속도를 조금 더 기다리고, 조금은 더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만약 그동안 주어진 걸 한 번에 착.착.착. 해냈더라면... 지금보다 사회가 말하는 제철 인간임을 내세울 수 있을진 몰라도  타인의 속도와 제철을 진심으로 존중하진 못했을 것 같다. 특히 나의 일터에서는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기다려주는 일이 더욱 절실해서 그런가. 나의 계절(제 철)까지 익어가길 잘한 것 같다.


“그 사람의 속도로 나오게끔 그냥 두는 거, 굉장한 존중과 예의라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빠르게 완료하지 못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대부분 오래 걸리는 시간 자체가 그 핵심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김금희 작가와 이동진 작가(평론가)의 아끼는 말과 글이다.


나 같은 거북이를 대변해주는 고마운 말 같아서이기도 하지만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보고 또 기다릴 것이다.



제철은 제 철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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