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되는 순간들
아빠의 투병 2회차, 나의 간병 2회차의 시작
아빠가 다친 날부터 시작된 처음 겪는 일들.
부모가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짧은 순간은 때론 시간이 멈춘듯하고 때론 울음 대신 억억 소리만 난다.
아빠가 20시간 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는 순간 예감했다. 신논현에서 대구까지 가는 길이 생생하다. 동생과 저녁을 즐기려 메뉴를 고르던 참이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ktx시간표를 보며 뛰었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빡빡한 9호선인지 2호선인지를 갈아타고 가는 내내 그 많은 인파에 끼여서 억억 소리를 냈다. 우는 것도 아닌 내 마음이 어쩔 줄 모르는
기괴한 소리...
가다가 동생이 주저앉으면 내가 일으키고 내가 주저앉으면 동생이 일으켰다. 어떡해 소리도 안 나오는 이미 급박한 순간.
아버지는119에 실려 대학병원에 갔다는데 삼촌에게 전화해도 연결 되지 않고, 나는 2시간 가까이 뛰어 겨우 서울역에 도착했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에게 우리 아빠에게 가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머뭇거렸지만
가 주었다. 첫 번째 대학병원에서는 뇌사라고 했단다. 우리는 그 소식에 또 한 번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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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에서 울며불며 아는 의사란 의사에겐 다 전화하고,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대구엔 뇌혈관 전문 병원이 있었고, 야간이었지만 원장님이 계신다고 했다.
동대구역에 내려서부터는 피 토할 만큼 뛰고 또 뛰었다.
처음 응급실에 도착해서 눈도 못 뜨는 아빠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오열했다. 아니 너무 놀라서 오열도 못하고,
고라니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 후에도 위기의 순간은 계속 찾아왔다.
뇌손상이 너무 심하다는 말. 아스피린 복용과 콩팥의 문제로 수술은 안 되겠고, 일단 지혈제를 써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동공이 열리면 그땐 이판사판으로 뇌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콩팥을 포기하고....('의사가 이판사판이다'란 말을 했다)
뇌를 연다. 뼈를 잘라 보관한다.
뇌에 상처가 가라앉으면 뼈를 다시 끼운다.
이 수술의 명칭은 개두술이다.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수술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아빠는 손가락만 겨우 까딱하는 와상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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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그런 순간은 또 찾아왔다.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내과의들이 계속 퇴원을 하라고 하던 중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등장하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아티반을 최대치로 투여하고,
또 투여하고..,
경련은 안 잡혔다. 혼수 치료를 해야 한다. 3일간 재우겠다. 아니 수면보다 더 깊이 재우는 것이다.
숨통을 끊고 인공호흡기를 달겠다.
(숨통을 끊는다는 표현도 의사가 했다. 나쁘게 생각지 않는다. 사실이다. 저체온치료라고도 한다.)
숨통을 끊는다는 말이 왜 그리 무겁고 겁나던지,
그때도 못 깨어날 수 있다.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 등등
동생이 동의서를 많이 썼다는데,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 그리고 아빠의 상태를 보면 그럴 땐 억억 소리만 났다. 중환자실로 가기 전
파주에서 내려가는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영상통화를 한다.
겉으로는 진지하게 의사 말을 듣는데
내 속에서는 미친년이 날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스로 자주 아빠의 죽음을 염두하며 간병했다고 여겼는데, 마지막일 수 있다는 그 순간은 왜 적응이 안 되는지.
올 여름 또 대 발작(뇌전증)을 겪으며 아직 준비가 안 된
나 자신을 확인했다. 아빠가 얼마나 더 사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막연한 죽음, 당황스러운 죽음 말고 내가 준비하고 아름답게 잘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중환자실에서 저체온 치료가 시작됐다.
아빠는 투병 2회차, 나에게는 간병 2회차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