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마지막화). 서른, 은퇴를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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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오늘은 내 인생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퇴사가 아닌 은퇴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그만두고, 행복이 우선되는 일로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재밌어서 했더니, 돈이 따라오는 삶. 진짜로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돈만 좇아서는 매일이 불행하다는 것. 원하는 만큼 벌게 되더라도 평생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허무해진다는 것.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가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나도 경험해 보기 전까진 몰랐다. 대기업에 가면, 돈만 많이 주면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시간과 건강, 그리고 행복을 돈과 맞바꿔야 했던 것이다.
어떤 삶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직접 겪어봐야 알게 될 터. 그래서 반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행복을 좇으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내 인생으로 증명해 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랄까. 이런 내 마음은 퇴직 인사를 담은 메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관례적인 절차로 전 직원에게 발송한 메일은 다음과 같다.
- 안녕하십니까, 환경팀 OOO입니다.
그동안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 한 분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 것이 도리이나,
서면으로 전달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업무에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과 좋은 추억을 생각할 때는
퇴사에 대한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지만,
꿈꿔 왔던 일에 도전하는 지금은 그저 지나온 일에 대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동안 잘 가르쳐 주시고 배려해 주셔서 항상 감사했고, 함께해 늘 영광이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기회가 닿는다면 좋은 곳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양한 반응이 흥미로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마디는 '새로운 출발'이라는 단어를 쓴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말이다. 환승 이직이 아닌 아예 다른 분야에 뛰어들고자 나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던 모양이다. 지금 내가 가진 밑천은 10년 치 최저 생활비와 버킷리스트 한 장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넉넉한 액수는 아니고, 믿을 구석도 없이 멘땅에 헤딩이다. 돈도 빽도 없는 내가 퇴사를 한다.
솔직히 통보하기 전 날까지 밤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혹여나 미래의 내가 후회할까 봐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퇴사 사유를 하나하나 적어두기까지 했다. 퇴사일자를 1년만 연기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면 퇴직금 앞자리가 바뀌고, 대리 진급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일에서 언제 수익이 날지 모르니, 가능한 많이 돈을 비축해 두어야 그나마 덜 불안할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같은 분야로 재취업을 해야 할 텐데 직급이 높을수록 유리할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저한 계산을 마쳤음에도 정확히 한 달 뒤, 나는 사직서를 쓰고 있었다.
퇴사 시기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2가지이다. 첫째로 건강 악화이다. 온몸에 염증이 퍼진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돌아가면서 아팠다. 회사에 있는 시간보다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다. 앞으로는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간 암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질병으로 커질까 봐 두려웠다.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악착같이 모은 돈을 수술비로 한꺼번에 날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온전한 정신과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때의 후회와 허망한 마음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는 상황을 초래해선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둘째로 새로운 꿈이 생겼다. 일에 대한 버킷리스트를 메모장에 빼곡히 나열하고 보니,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분야였다. 지난날을 돌이켜 봤을 때 새롭게 경력을 쌓고, 자리를 잡는 데까지 최소 5년은 걸릴 것이었다. 갑자기 시간이 없다는 조급함이 들었다. 더 이상 회사에서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순 없었다. 고작 몇 백만 원 더 벌자고. 새로운 분야에서는 지금의 직급도 쓸모없어질 테다. 나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특출 난 재능은 없어도 우직한 끈기 하나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낸 인간이다. 물론 운도 따랐겠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일을 5년 동안 버틸 수 있는 체력을 입증한 것이다. 꾸역꾸역 했던 일도 성과를 냈는데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리라 믿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퇴사를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내 의사는 2주 만에 팀장에서 본부장, 인사팀, 본사까지 차례로 전달되었다. 한 달간 인수인계 하기로 협의해 마지막 근무일은 3월 31일로 확정되었다. 전날에 책상과 캐비닛 정리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퇴직 인사를 올렸다. 2,000명 가까이 되는 분들께 모두 인사드리기 어려워 메일을 보낸 뒤 직접적으로 업무를 함께 했던 분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분을 찾아뵈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부장님께서 꽃다발을 건네주셨다. 태어나 받아본 꽃 중 가장 크고 풍성했다. 팀원들은 자가용이 없는 나를 사택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찻길 양옆으로 벚꽃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3월의 봄, 우리가 타고 있던 트럭이 벚꽃 샤워를 하며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바닥은 꽃잎으로 분홍색 카펫이 깔린 것 같다. 앞으로 꽃길이 펼쳐질 거라고 만물이 축복해 주는 듯하다.
누군가 내게 퇴사 적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3월이라고 말할 것이다. 매서운 추위로 나뭇가지가 휑한 겨울이라면 심란한 마음이 더욱 처량해지지 않을까. 가만히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은 이사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 푸근한 봄바람에 벚꽃 잎이 휘날리는 광경은 희망으로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3월의 봄,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끝났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벚꽃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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