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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 Jul 03. 2019

#2: 잘나가던 코미디 작가가 대관령에 취직한 까닭

대관령 목장지기 이태훈 씨


이태훈 씨(37)는 서울에서 여러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방송 작가, 소셜커머스 회사 직원, 여성복 쇼핑몰 대표, 마케팅 회사 CEO, 디자인 소품샵 운영까지. 방송 작가로 제법 이름을 알렸던 그는 많을 때는 연 3억원의 수입을 내기도 했다. 동시에 두 세 가지의 일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항상 다음 일을 생각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버티는 삶이었다. 

지금 이 씨는 강원도 평창 대관령의 하늘목장에서 관리자로 일한다. 목장 기숙사에 머물면서 양과 젖소를 돌보고 꽃을 심는다. 가이드로 일하면서 목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마차를 타고 목장 곳곳을 안내한다. 잘 나간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살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했다. 대관령의 '목장지기' 이태훈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관령 하늘목장의 '전천후 일꾼'


해발 800m가 넘는 대관령. 넓게 펼쳐진 초지에 흰 울타리가 보였다. 굽이굽이 흐르듯 거칠지 않은 능선. 그 안의 양과 젖소, 말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목장 사이에 나 있는 길로는 트랙터가 끄는 마차가 천천히 달렸다. 이 마차에 몸을 싣고 15분이면 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에서는 목장 전경과 횡계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대관령 하늘목장이다. 


목장을 안내하는 트랙터 마차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에 어른들은 미소 짓고,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전망대에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을 이끄는 건 하늘목장에서 일한 지 17개월 된 이 씨다. 일반 직원이었다가 지난 2월부터 목장 매니저(관리자)가 됐다. 가이드부터 매표, 농장 꾸미기, 양과 젖소 관리까지 전천후로 일하고 있다. "목장 규모가 커서 할 일이 많습니다. 매니저다 보니 목장 구석구석 돌아가는 일을 다 알고 챙겨야 하거든요." 


하늘목장의 면적은 약 300만평. 월드컵 경기장 500개 크기다. 원래 한일목장이라는 이름으로 1974년 조성됐고, 2014년 대중에 개방한 뒤 작년 한 해에만 20만명 가량이 방문했다. 하늘목장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는 이 씨 같은 목장 직원들의 숨은 노력이 있다. "목장 일이란 게 일손이 필요한 부분이 갑자기 튀어나와요. 오늘은 하루종일 가이드에 정신이 없고, 내일은 목장에 꽃을 심는 날이네요. 하하." 


그는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지난해 1월 목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생활은 목장 기숙사에서 한다. 주말이 바쁜 관광형 목장이라 토요일과 일요일 내내 일해야 하지만, 월요일과 화요일은 쉰다. 이 씨는 지금 일이 즐겁다고 했다. "재미있어요. 막 웃겨 죽겠다는 게 아니라 몸은 바빠도 마음이 편해요. 목장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요. 내가 없으면 목장이 안 돌아간다는 것?(웃음) 할 수 있는 것을 다 쏟아붓고 있는데, 불안감이 없어요." 


늘 쫓겼던 서울에서의 삶

서울에 살 때 이 씨는 성공을 한 열망이 컸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아이디어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후 늘 방송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방송 작가로서의 일상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씨도 나름대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늘 압박감에 시달렸다. 도태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온라인 의류 쇼핑몰도 운영하고 바이럴 마케팅 회사도 차렸다. 한꺼번에 두 세 개의 직업을 갖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원래는 코미디 작가만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성과가 안 나오니까 이것 저것 시도를 했죠. 그 중엔 잘된 것도 있고 망한 것도 있고." 

소셜 커머스 업체인 위메프에서 일하다가 디자이너 소품샵도 열었다. 가게가 잘 되면서 돈도 적잖게 벌었다. 하지만 이 씨는 항상 초조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씨를 부러워해도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에게 서울 생활은 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를 자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저보고 일을 똘똘하게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막상 힘들었습니다. 특히 마케팅 회사를 차려서  일할 때 돈은 가장 많이 벌었지만 자괴감 역시 최고치였죠. 내가 환경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끝내 지우지 못했어요." 


이태훈 씨가 운영했던 소품샵.


어느 날, 즉흥적으로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사는데 마음은 늘 초조했던 삶. 그걸 그만두고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해보자고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네이버에 접속해 사회랑 정치 뉴스 체크하고, 이동 중에 잠깐 짬이라도 나면 휴대폰으로 뭐라도 확인해야 하고, 촌스럽지 않으려고 옷 가게도 정기적으로 둘러봐야 하고, 어디 가서 내가 트렌디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고. 끌려가기 싫어서 발버둥치고 있는데, 그 자체로 끌려가고 있던 삶이었죠." 


그가 선택한 삶, "목장으로 가자"

도시를 떠난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이 씨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 중 목장을 택한 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삶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흙을 만지고, 동물을 돌보면서, 몸으로 직접 부딪히는 삶에 대한 열망. "우리가 살면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옷이나 음식, 집. 도시에서는 이런 것들 앞에서 늘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예를 들어 5만원 한도 내에서 옷을 사야 하는데, 딱 몇 가지 중에서 골라야 하는 거예요. 저는 흙집을 만들어서 살든, 옷을 기워서 살든, 농사를 지어서 직접 먹거리를 조달하든, 뭐 하나는 내가 직접 할 줄 아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존에 있는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드는 삶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농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신혼에 아들이 막 태어났을 때라 장인 장모의 반대가 심했다. "내 딸 고생시킬 생각하지 말고 취직하라 하셨죠. 고민하다가 목장 취업을 결심했어요." 인터넷에서 무작정 '강원도 목장'을 검색해 찾은 것이 지금 하늘목장의 채용공고였다. 어린 아들을 두고 기숙사에 살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래서 더 용기를 냈다. 


"멋진 남편,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도시에서 살고 있던 모습은 그다지 멋지지 않았어요. 그저 버티느라 허비한 시간들이 있었고, 살아 남기 위해서 발만 동동거렸던 때도 많았어요. 그런 삶을 제 아들은 살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지금은 목장에 혼자 살고 있지만, 올 가을엔 목장 인근에 작은 집을 얻어서 가족이 함께 살 계획을 하고 있다. 지금은 쉬는 날에만 볼 수 있는 가족과 더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어린 아들 역시 시골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게 하면서 키우겠다고 했다. "저는 굉장히 엄한 집에서 자랐어요. 문제집을 몇 개씩 풀어야 하고, 틀리면 혼나고. 그게 습관이 돼 참 아등바등 살았던 것 같아요. 우리 아들은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도시의 삶이 싫어서 뛰쳐나온 이 씨지만 도시에서 배운 것들은 지금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방송작가를 하면서 얻은 감각과 가게를 운영하면서 얻은 서비스 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목장에도 있다는 것. "목장 가이드 업무를 하는데 방송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결국엔 사람의 마음을 훔쳐야 한다는 점이죠."  



목장 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배운 것도 많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농장의 어르신들과 어울리고, 함께 부대끼면서 가까워지는 법을 알게 됐다. "처음엔 서울에서 했던 것처럼 어르신들에게 극존칭을 써가면서 일을 했는데, 이상하게 가까워지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서글서글하게 다가가니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은 지금까지 시골을 지켜온 분들과 새롭게 들어온 젊은 세대가 섞여 일하는 중간 어디 즈음에 있는 것 같아요."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을까. 그는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했다. 서울에 살 때와 비교하면 월급이 훨씬 적지만 마음은 편하다는 것. "이상하게 돈을 많이 못 버는데 돈이 부족하지가 않아요. 저축도 꼬박꼬박 하고 있고요. 도시에선 뭘 사야 하고, 뭘 채워놔야 하고, 사람들의 눈을 신경써야 하는 게 있었는데 여기선 그런 게 없어요. 갖고 있던 차도 팔고 '똥차'로 바꿨습니다. 하하."

항상 트렌드를 찾는 일에 몰입해야만 했던 방송작가 출신이 뒤처진다는 것에 두려움은 없을까. "아니요. 지금은 압박감이 없어요. 오히려 내가 모든 걸 다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해방감, 희열이 엄청났습니다. '아니, 이걸 몰라도 아무렇지 않잖아!' 유행하는 드라마를 몰라도, 아이돌 이름을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것만 해도 압박감이 30%는 줄어든 느낌입니다.(웃음) 어떻게 보면 지금은 도시에서 체득했던 것을 조금씩 버려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버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가는 과정."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했다. 물론 이 행복은 중간에 사라질 수도 있고, 어느 순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고 했다. 그가 도시의 삶에 힘겨워하고 있는 또래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뭘까. 

"저는 특별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누가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래도 만약 내 친구가 고민을 상담해 온다고 하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네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라'고. 그게 귀농이든 귀촌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이든,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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