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 배방남 씨
천안시 풍세면 민속보존관 민학전가(民學傳家). 눈 속에 푹 파묻힌 듯한 민학전가에 들어서자 영하의 추운 날씨에 쩌렁 쩌렁, 망치 소리가 경쾌했다. 멋스런 모자를 쓴 한 노인이 투박한 손으로 돌을 쪼개내며 뭔가를 새기고 있었다. 크지 않은 체구가 돌덩이에 붙어 한 몸 같아 보였다.
3대째 공예장인“백제미소 담고파”
“돌이라고 하면 그냥 투박해 보이지? 돌이란 게 얼마나 세심한 재료인지 사람들은 몰라.” 민속공예가 배방남(68)씨는 그 돌을 닮았다. 조용하고 단단하다. 그가 돌장승 사이에 서면 그는 또 하나의 돌장승이었다. 손엔 돌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잔뜩 박였다. 석공으로 산 세월이 자그마치 반백년이다.
“돌을 보면 얼굴이 보여. 그 속에 누가 숨어 있는지 내 눈엔 딱 보여.” 평생을 돌과 함께 해온 배씨. 그는 아무 돌이나 가져다 깎는 게 아니라고 했다. 돌마다 찾아야 할 모양이 있고 주인이 있다고 했다. 그걸 찾아 표현해내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수천 개의 돌을 그렇게 깎았다. 이만하면 지겨울 법도 한데 배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돌 앞에 앉는다.
그는 3대째 공예장인이다. 할아버지가 석공이었고 아버지는 금속공예를 했다. 그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배씨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공예를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덟부터 일하기 시작해 지금껏 50년을 공예가로 살았다. 돌을 주로 깎지만 나무도 만진다. 어디 돌과 나무뿐이랴. 도자기에 금속공예까지 한다. 그는 “하나를 할 줄 알면 나머지도 다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고 했다.
배씨는 항상 망치를 잡기 전 목욕재계한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생각에서다.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나중에 보면 다 보여. 그러니까 장인 정신으로 깎아야지.” 만드는 사람의 기운이 작품에 그대로 들어간다는 배씨의 신념이다. 배씨는 얼굴 표정을 새기는 데 혼을 바친다. 재주만 배우면 몸이야 못 깎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그럴 수 없단다. “백제의 불상을 본 적 있어? 그 푸근하고 그윽한 미소. 후손들을 다 보살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는 자신의 작품에 그 미소를 담고 싶다고 했다.
배씨의 작품은 태안 안면도 장승공원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서울 삼성동), 외국인학교(인천) 등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는 어디든 선뜻 작품을 만들어 내놓는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으로 누군가 전통공예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보람이란다. “그냥 시민을 위해서 기증하는 거야. 내 이름이 바로 명예가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 사람들이 우리 공예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잖아.” 배씨가 아직까지 돌을 깎는 이유다.
문화 계승 위해 민학전가 열어
배씨는 우리 고유의 문화가 사라질까 걱정이 많다. 그가 만드는 장승과 불상을 찾는 사람도 자꾸 줄어든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토속문화의 가치를 잘 몰라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1998년 민속보존관 ‘민학전가’를 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토속문화가 안타까워 직접 나서게 됐다. 민학전가는 ‘백성이 배우고 전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배워 이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민학전가엔 악기와 나막신, 도자기 같은 전통 생활용품과 공예품이 가득하다. 모두 배씨가 모은 것들이다. 학생들을 비롯해 가족단위와 외국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배씨는 사람들이 전시품들을 보고 좋아할 때 제일 흥이 난다고 했다.
민학전가 마당엔 장승 수십 개가 서 있다. 그 중엔 자그마한 장승도 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언젠가 구경 온 아이가 목이 아파 장승을 못 쳐다보겠다고 투정을 부린 이후 그렇게 깎았다. 아이들이 장승을 직접 끌어안고 만져보고 해야지 친근해진단다. 이제 배씨의 남은 바람은 딱 하나다. “우리 아이들, 내 후손들에게 토속문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다 가고 싶어. 그게 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