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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게릴라 Aug 14. 2021

엘크성의 까막인어, 정이(브런치X저작권위원회_글부문)

브런치 X저작권위원회 다시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2차 글부문<인어공주>

 브런치 작가와 함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인어공주>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재해석한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제13회 공유저작물 창작공모전 2차 글부문 응모작입니다.


엘크성의 까막인어, 정이

사진출처: 월트디즈니_네이버

1. 도시 바다 위에 지어진 유리성

 파아란 하늘을 품은 물결에 햇빛이 반사되어 너울대는 남쪽 바다. 봄기운을 다투며 만발하는 이윽한 봄바람에 조용히 이는 하얀 파도에 밀려온 모래알이 진주알처럼 반짝이는 해변. 그 모래사장을 둘러싸고 까마득히 높고 화려한 빌딩들이 죽 잇대어 있는 바다의 도시. 사람들은 이 도시를 해운대라고 불렀다.

 이 이국적인 풍경을 보기 위해 도시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고, 세계의 자본가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더 높고 화려한 건물을 짓기 위해 해운대를 찾았다. 우후죽순 들어서는 높은 건물들과 무분별한 관광개발이 자연경관과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환경보호가들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별다른 제제 없이 건축허가를 받아 냈다. 급기야 100층이 넘는 유리성 '엘크'가 해변 한가운데 우뚝 지어졌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이 '엘크 왕자'래. "

 "서쪽 섬에 공항을 만들었다는 그 '엘크'말이야?"

 "맞아. 이미 해운대 관광산업개발로 큰돈을 번 혼혈왕자야. 해변 끝 H호텔도 엘크의 소유지 아마."

 엘크성의 완공을 축하하는 불꽃축제에 모인 도시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뻥! 뻥~!"

 굉음 소리와 함께 빨강, 주황, 노랑... 무지개 빛깔로 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낭자하게 흩어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바닷속으로 내려앉았다. 어둠이 깊을수록 반짝이는 도시는 뉴욕의 맨해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밤이 깊어도 꺼지지 않는 건물들의 불빛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도시는 거대한 자본이 만들어 낸 세리머니에 한 껏 취해있다. 하지만, 이 휘양 찬란한 풍경에도 바다는 아랑곳 않고 소리 없는 정적 속에 고이 잠겨 있었다.


2. 도심 속의 작은 어촌, 미암

 시간이 흘러, 아침이 밝았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불빛이 꺼지고 잠든 도시는 한없이 고요했다.

 "뚜우~"

 어디선가 나지막이 울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동쪽 하늘이 희부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해운대 동북쪽 자리 잡은 와우산의 꼬리 부분에 있는 갯가에서는 작은 통통배들이 새벽을 알렸다. 앞서 뱃고동을 울리는 작은 배를 따라 다른 통통배들도 노오란 전구등을 켜고 줄지어 출항 준비에 나섰다. 마을을 지키는 방파제 등대에 불이 켜지고, 버선발로 뛰어나온 아이들이 조막만 한 손을 쫙 펼치고 팔을 힘껏 흔들며 고기잡이 배의 무사운항을 응원했다.

 "호오이~ 호오이."

 해녀들은 꼭두새벽부터 숨비소리를 내며 물질을 시작했다. 해녀들은 수북이 잡아 올린 앙장구, 성게, 고동, 우뭇가사리 등을 긴 그물망에 담았다. 물에서 나 온 해녀들은 물옷을 입고 그대로 돌부리에 철퍼덕 걸쳐 앉아 해산물을 재빠르게 손질해 빨간 물대야에 담았다. 그리고 물질로 잡은 해산물을 바로 새벽시장에 나가 내다 팔았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수산물과 푸짐한 인심으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마을을 찾았다. 새벽녘, 지난밤과 완전히 대비되는 어촌 풍경이 같은 도심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작은 바닷 마을 뒤로 보이는 드높은 빌딩들과 이질 되는 낯선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이 바닷 마을을 소가 누워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와우산의 꼬리에 해당하는 갯가라 하여, '미암'이라고 불렸다. 해운대 끝단에 자리한 미암에는 해운대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호텔과 여관, 작은 횟집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수의 미암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해운대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해녀들은 오래전 생업을 위해 제주에서 이주 해왔다. 어려서부터 헤엄치기와 무자맥질을 배운 해녀들은 물질을 생업으로 했지만, 농사일과 겸하였다. 할머니 해녀들이 추운 겨울에도 물옷을 입고 무자맥질을 하는 모습을 미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미암의 해녀들은 모두 60세가 훌쩍 넘은 노령이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3. 미암 마을의 까막인어

 좁은 마을 어귀 곳곳에 분분히 핀 배꽃나무에 살강한 아침햇살이 들자, 배꽃 잎 하나가 물을 한가득 받아 놓은 어느 빈 대야 위에 사뿐히 떨어져 앉았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가 파르르 떨리며 물매암 졌다.

 "에고 머니나! 정이가 안 보여요."

주인이 없는 빨간 대야를 보고, 먼저 물 밖으로 나온 할머니 해녀들이 소리쳤다.

 "정아? 정아?!"

 "호오이."

 그때 긴 숨비소리를 내뱉으며 나온 정이는 얼굴에 미역처럼 달라붙은 검고 긴 머리칼을 한대 모아 질끈 묶었다.

 "에코, 정아. 네가 사라졌는지 알고 깜짝 놀랐단다."

 정이는 할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철없는 손녀는 잇몸을 환하게 드러내 싱긋 웃으며 허리 고무끈에 차고 있던 전복 하나를 들고 흔들었다.

 "그려 그려, 오늘은 청물이 들었구나. 오늘은 전복내장을 몽땅 넣고 바다내음이 듬뿍 나는 청록빛 전복몽땅죽을 끓여줄 테니, 실컷 물질을 하다 나오려무나."

 "흐으음..."

 정이는 다시 깊은숨을 몰아쉬고,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더없이 고요한 바닷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밧줄에 뿌리를 붙인 미역들이 물구나무처럼 쭉쭉 뻗어있는 아래로 몸을 휘감는 강한 조류 속에 정이는 몸을 맡겼다. 수심 3m 정도 내려간 후, 올려다보는 바다의 푸른 배경 아래 미역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안녕, 정아!”

 말미잘에 숨어있던 니모가 정이의 앞에 나타나 길을 안내했다. 정이는 니모를 따라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정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불가사리와 바다나리가 몸을 급히 숨겼다. 바위를 들추차 게와 고둥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맑은 물색에 담수를 좋아해 강 하구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갔던 가지매기와 벵어돔이 바다로 돌아왔다. 정이의 머리 위로는 난류에 실려온 수백 마리의 열대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난류가 연안으로 유입되는 청물이 든 날엔, 바닷속 시야기 빵빵 터져 오색 물고기들이 노니는 물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오랜만에 청물이 든 바다의 맑은 시야에 행복감에 한 껏 젖은 정이는 긴 지느러미를 흔들며 자유로이 물속을 유영했다. 육지에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는 정이에게 물속이 주는 유연함과 신비로운 바닷속 세계는 크나큰 선물이었다.

 "정아, 걸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어도,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단다."

 "저 푸른빛에 몸을 푸욱 담그면 아주 신비로운 마법이 열리지. 그 마법은 온몸을 저 바다에 던져 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란다."

 정이는 어릴 적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미암 마을의 해녀였던 할머니는 정이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할머니는 정이를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옷을 만들어 주고, 물질을 가르쳐 주었다. 검은 지느러미가 달린 물옷은 바닷속에서 정이의 다리가 되어주었다. 정이에게 바닷속 물고기들은 유일한 친구였다. 계절마다 다채롭게 펼쳐지는 바닷속으로 정이는 매일 새로운 여행을 했다. 정이는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지만 바다가 있어 행복했다.

 청물이 든 맑은 물색에 신이 난 정이는 바다 깊숙이 내려갔다. 그러다 그만 조류에 휩쓸려 가고 말았다. 소리 없이 소용돌이치는 바닷속으로 정이는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정이는 깜짝 놀라, 그만 바닷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4. 까막 인어, 엘크 왕자를 만나다

 "푸우르르릉."

 정이는 머금었던 짭조름한 바닷물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까슬까슬한 모래알을 움켜잡고 겨우 허리를 편 정이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맞은편에 미암 마을의 방파제와 등대가 보였다.

'휴, 다행히 멀리 떠내려온 것은 아니구나.'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던 정이는 깜짝 놀랐다. 바다 바로 앞에 대리석으로 반짝거리는 테라스에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유리성이 하늘에 맞닿아 있었다.

 '엘크성이야. 이렇게 가까이에서 엘크성을 본 건 처음이야.'

 미암 마을의 방파제에서 바라만 보던 엘크성의 웅장함에 정이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 높은 성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바다 세계보다 더 황홀한 마법이 이 안에 있을 거 같아.'

 정이는 생각했다.

 '이 성에는 누가 사는 걸까? 엘크는 왕자님일까? 마법사 일까?'

 정이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찰나, 성에서 걸어 나온 어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모랫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있는 정이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성큼성큼 해변으로 걸어왔다.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다름 아닌 '엘크성'을 지은 왕자, 엘크였다. 정이 앞에 선, 왕자는 까만 지느러미를 입고 있는 정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넌 누구니?"  

 묻는 엘크의 물음에 정이는 애써 소리를 그르렁 거려봤지만, 아무것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말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난 엘크라고 해. 이 엘크성의 주인이자, 해운대를 세계의 관광도시로 만든 왕자지."

 '이 사람이 엘크라고? 이렇게 젊고 잘생긴 왕자님일 줄 몰랐어.'

 왕자가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정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일렁거리며 환해졌다. 정이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미암에서 정이는 할머니께로부터 엘크성의 왕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성에는 아주 늙고 못생긴 왕자가 산단다. 그 왕자는 그래서 저렇게 큰 성을 짓고 성 밖을 나오질 않지."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 정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이가 상상해왔던 모습과 달리, 엘크는 훤칠한 키의 잘생긴 왕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검은 머리와 대비되는 푸른 눈빛은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반면, 정이는 길게 늘어뜨린 검은 생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퇴약볕 아래 밤낮 없는 물질에 새까맣게 탄 살결을 가진 까막 인어였다.

 왕자 앞에서 정이는 갑자기 자신이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다. 정이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봤지만 물 밖에서는 걸을 수도,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도 없었다. 정이의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혔다. 정이는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 없이 울었다.


5. 유리성의 까막 인어, 정이

 "울지 마. 내가 도와줄게."

 엘크 왕자는 젖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정이를부축했다. 왕자가 손짓을 하자, 성을 지키고 있던 시커먼 슈트를 차려입은 보디가드들이 나와 함께 정이를 안고 엘크성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로 뒤덮인 엘크성 안은 푸른 하늘빛이 자아내는 채광으로 오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곳은 바다 위에 지어진 마법의 성이 분명해.'

 엘크성의 웅장함에 정이는 정신을 잃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왕자는 엘크 성에서 가장 큰 방을 청이에게 내어 주었다.

 "여기서 당분간 머물도록 해요."

 엘크성에서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방은 화려한 샹들리에와 장식품들로 가득했다. 정이는 구름성 위에 떠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방에서는 정이가 놀던 바다와 미암 마을이 보였다. 정이에게는 끝없는 우주와 같던 바다가 이곳에서는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엘크성에서 바다는 낮아 보이고, 미암 마을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 검은 지느러미 물옷을 벗고, 이 옷을 입어보렴. 이제 또 다른 세계를 입는 거야."  

 왕자는 정이에게 에메랄드빛 드레스와 구두를 선물했다. 옷을 갈아입은 정이는 바다 빛깔을 닮은 실크 드레스와 구두가 쏙  마음에 들었다. 왕자를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필해 온 집사를 불렀다. 환하게 미소 짓는 왕자의 집사는 머리가 희끗희끗 센 할머니였다.   

 "이 소녀를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왕자님."

 "자, 귀여운 까막 인어공주님. 다리를 쭉 뻗어보시겠어요. 부끄러워 말아요. 이제 그 물옷을 벗고 어여쁜 공주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집사는 정이의 질퍽하고 검은 지느러미를 벗기고, 예쁜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자, 진짜 공주님이 되었네요."

 집사는 닫혀있던 커튼을 젖히고, 커다란 거울을 청이 앞으로 가져왔다. 영롱한 검은 눈빛에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은 정이의 모습에 왕자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왕자는 심장이 두근두근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검은 지느러미가 아닌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정이는 다른 세계를 입은 것만 같았다. 왕자는 정이 앞에 구두를 가져왔다.

 "내가 도와줄게."

 왕자는 정이의 힘없는 발에 조심스레 구두를 신겨주었다. 바다의 윤슬을 닮은 빛나는 구두였다.

 '이렇게 예쁜 구두를 신고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이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왕자는 걷지 못하는 정이를 위해 자동 휠체어를 제작했다. 정이는 왕자가 선물한 휠체어를 타고 엘크성 곳곳을 구경했다. 100층을 넘어선 엘크성에는 도서관, 헬스장, 학교, 슈퍼마켓, 레스토랑, 놀이동산 등등 모든 것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사고 이후, 미암 마을과 바다밖에 본 적이 없던 정이에게 엘크성의 모든 것이 새로웠다.

 '바다 세계보다 더 드높고, 다채로운 세계가 이곳엔 모두 다 있어.'

 엘크성에 온 이후로 정이는 다시 미암 마을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엘크성에서 정이는 걸을 수도 헤엄칠 수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만든 산해 지미의 음식들과, 예쁜 옷과 구두, 다양한 놀거리와 볼거리가 모두 있었다.

 엘크성의 사람들은 청이를 '까막 인어'라고 불렀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까만 눈동자와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가씨가 까만 지느러미가 달린 물옷을 입고 바다에서 나타났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6. 엘크 왕자와 사랑에 빠진 까막인어

 초승달이 바다 위로 아스라이 떠오르는 날,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정이는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미암 마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리 차창에 사뿐히 내려앉은 빗방울이 눈앞을 어롱거리다 미끄러져 흘렀다.

 '저 비는 달빛의 눈물일까?'

 달빛이 눈물을 흘리는 날에 바다는 한없이 고요하고 잠잠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마다, 정이는 바닷속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었다. 비 내리는 날의 고요한 바닷속은 한없이 너그러운 할머니의 품 같았다. 정이는 갑자기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할머니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해가 뜨면 다시 검은 물옷을 입고, 이제 그만 미암으로 돌아가야 할까.'

정이는 고민에 휩싸였다. 그때, 정이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누군가 쓰다듬었다. 엘크 왕자였다.   

 "바다가 그리운 거야? 저 바다 언저리, 네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묻던 왕자가 조심스레 고백을 했다.

 "나와 함께 여기 머물러죠."

 정이가 엘크성에 온 후부터 왕자는 단 한 번도 청이의 이름도, 고향도 묻지 않았다.

 "네가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중요하지 않아."

 "네가 걸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어도 괜찮아. 너는 이미 나의 유일한 친구고, 연인이니까."

 정이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사실 정이도 왕자에게 친구 이상의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몽글몽글 맺히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정이를 흔들고 있었다. 정이의 거친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앉는 엘크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7. 아쿠아리움의 인어공주

 매일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며 놀던 정이는 엘크성에서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가를 매운 많은 책들 속에 세상은 정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엘크성에서 아스라이 멀기에 종잇장에 새겨진 텍스트를 통해서만 매만질 수 있을 뿐. 직접 보고, 매만지고, 느낄 수 없는 세계였다. 마치 엘크성에서 바라만 보는 망망대해의 바다처럼.

 엘크성에서 정이는 넓고 푸른 바다를 모두 가진 듯 같았다. 하지만, 바람에 이는 파도의 소리도,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빛도,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의 숨결도 더 이상 느낄 수는 없었다. 엘크성에 갇힌 청이에게 바다는 이제 멀리서 바라만 보고, 책을 통해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되었다.

 엘크성는 다른 놀거리가 많았지만, 몸이 불편한 정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정이는 자주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쓰지 않는 다리 근육은 더 뻗뻗해지고, 자주 뻐근거렸다.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엘크성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껏 기분에 취해 춤을 췄다. 하지만 정이는 휠체어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서는 나도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었는데.'

 문득 바다가 그리워진 청이는 시무룩해져 방에 들어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이가 흐느끼는 모습을 본, 엘크는 마음이 아팠다.  

 엘크는 정이를 위해 엘크성의 지하에 아쿠아리움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아쿠아리움에는 바다에서 수초와 바위를 가져와 심고, 각종 물고기와 바다 생물들을 가두고 길렀다. 아쿠아리움의 유리 수족관 속은 바다환경과 아주 흡사했지만, 이상하게 아쿠아리움 속의 물고기들은 행동이 느려지거나, 땅에 붙어만 있었다.

 엘크성에 거대한 아쿠아리움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개관식에 맞춰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침부터 줄지어 엘크성으로 모여들었다. 아쿠아리움의 개관식에 왕자는 정이를 데려갔다. 휠체어에 앉은 정이는 유리 수족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 이제 이 바다는 모두 너의 것이야. 이 안에서 너는 다시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어. 너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얼른 들어가 보렴."

 왕자는 검은 물옷 대신 보드라운 비단을 입혀 만든 반짝거리는 지느러미 옷을 정이에게 내밀었다. 새로운 물옷으로 갈아입은 정이는 너무 좋아서 첨벙 얼른 유리 수족관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휘이."

 숨비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떠올랐다가, 긴 숨을 들이쉬며 수족관 깊숙이 정이가 들어가자, 엘크는 정이를 위해 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수족관에 백열등이 환히 밝혔다. 정이는 눈을 쏘아대는 하얀 불빛에 눈이 아팠다.

 "아아악!"

 눈을 비비던 정이를 수족관 밖에 서 있던 꼬마가 발견했다.

 "인어공주다!"

 꼬마가 소리치자 아쿠아리움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정이 앞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지느러미로 수족관 속을 유영하는 인어를 본 사람들은 정이의 시선을 끌기 위해, 수족관의 유리를 쾅쾅 두드렸다. 깜짝 놀란 정이가 고개를 드는데, 이번에는 펑펑 밖에서 카메라 휘레쉬가 정이의 얼굴을 마구 쏘아댔다. 정이는 재빠르게 헤엄쳐 바위 뒤에 숨었다. 하지만 몸을 숨기기에 수족관 속 바위는 한 없이 작았다. 사람들의 인적에 놀란 물고기들도 놀라 도망을 갔다. 그때, 정이가 숨은바위 뒤에 심어놓은 수초에서 노오란 니모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너는?'

 미암 앞바다에서 정이가 물질을 할 때마다 길을 안내하던 니모였다. 니모는 정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는 힘없이 딱딱한 수족관의 플라스틱 바닥 위에 가라앉았다.

 '니모, 니모, 안 돼 정신 차려.'

 정이는 말없이 니모를 흔들어보았지만. 니모는 가는 숨을 아가미로 힘겹게 내쉬고 그 뒤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른 채 수족관 속으로 온 바다나리들은 바위 사이에 갈고리를 펴고 붙어만 있었다. 바다거북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물의 수온과 환경이 달라진 열대어들은 행동이 둔해져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바다친구들을 본 정이는 가슴이 아팠다. 유리 수족관 속에 갇힌 바다친구들의 모습이 유리성에 갇힌 자신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

 "후후훕."

 정이는 죽은 니모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참았던 숨을 내쉬며 수족관 밖으로 나왔다. 정이는 죽은 니모를 마른 헝겊으로 고이 닦았다.   

 '가자. 가자. 다시 바다로.'

 가슴속에서 아우성치는 말을 채 내뱉지 못한 채 정이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깊은 밤, 정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수척한 얼굴로 바다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엘크성 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높은 도시의 건물들에 이제 정이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정이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다시, 바다의 숨결을, 푸른 생동감을 정이는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 숨 쉴 수 있을 거 같았다.  


8. 다시, 바다로

 '나는 엘크의 세계를 나의 세계로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정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엘크성의 안락한 삶에 취해있었다는 사실을. 엘크성에서 정이는 엘크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 정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크성 안에 쌓아 올려진 도시의 문명들은 거대하고 높았지만, 그 속에서 정이는 자신이 유리성 안에 갇힌 인형처럼 느껴졌다. 그 모두, 정이가 직접 피부로 느끼고, 사색하고, 땀 흘려 얻은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이는 엘크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허구처럼 느껴졌다.

 '엘크에 대한 사랑도, 어쩌면 나는 그가 아닌 그의 세계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잠에서 깨어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꿈처럼,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하루가 어찌 흘렀는지 모르게 벌써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정이와 왕자는 나란히 앉아 바다를 붉게 태우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따스한 석양빛이 어색한 방안의 공기를 아늑히 매우고 있었다. 왕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정이에게 내밀었다. 갓 볶은 커피콩의 훈훈한 향기가 코끝에 스미었다.

 "이제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도 좋아. 이제 너는 진정 너를 사랑하고, 너의 인생을 온몸으로 껴안기 위해 바다로 가는 거야."

 말을 떼며 입술이 파르르 떠는 왕자의 푸른 눈망울엔 깊은 슬픔이 고여있었다.

 '함께하지 못해도,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할 거야. 푸른 바다, 저기 저 언저리 어딘가에서 춤추고 있을 나의 까막 인어공주를 위해서 말이야.'

 왕자는 휠체어에 앉아 바다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정이를 보며, 깨달았다. 때론, 진정 사랑해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랑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이는 왕자가 선물 준 파란 구두를 손으로 벗어 그의 앞에 고이 놓았다. 정이는 왕자에게 아무 작별의 인사를 건네지 못했지만, 그의 손을 잡고 무언의 기도를 했다.

  '부디, 오래도록 함께 할 새로운 사랑을 찾길 진심으로 바래요.'   

 엘크 왕자는 말없이 정이를 꼭 껴안았다. 때론 말없는 말이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다시 하늘이 희부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정이는 휠체어를 타고 나와 지저귀는 갈매기 떼를 바라보며 해변가에 앉았다. 안개비 개이고, 청명한 가을바람이 하얀 파도에 실려왔다. 정이의 검은 머리칼이 너울너울 흩날리는 중에 반대편 미암리 항구에서 출항을 알리는 어선들의 뱃고동 소리가 바람에 실려 선명하게 들려왔다.

 "뚜우~"

 정이는 있는 힘껏 바다를 향해 휠체어를 몰았다.

 "쿵!"

 어느 정도 깊이에서 파도에 부딪쳐 엎어진 휠체어는 홀로 모래사장 가운데 다시 쓸려왔다. 정이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뽀르르~ 뽀르르."

 정이는 깊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우~"

 정이는 다시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들고 다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정이에게는 이제 지느러미가 없었다. 정이는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두 다리를 있는 힘껏 더 흔들었다. 그때 정이는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것이 미묘하게 느꼈다. 발끝에서부터 단단해진 근육의 힘이 올라오더니 두 다리가 어느새 물결을 힘차게 휘젓고 있었다. 정이는 더 힘 껏 세로줄로 두 다리를 휘저으며 바닷속을 걸어 올라왔다. 바다 표면으로 올라온 청이는 숨비소리를 내었다.

 "휘이이~"

 정이는 그리고 다시 더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팔을 쭉 뻗으며 들어갔다. 정이의 등장에 노오란 니모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피웠다. 청물이 든 바다에 뻥 뚫린 시야엔 무성히 자란 수초와 바위 사이로 게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정이의 머리 위로 수백 마리의 멸치 떼가 은하수를 그리며 지나갔다. 정이는 살아있는 바다의 숨결을, 그 넓고 고요한 속삭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 끝없는 신비 속에서 정이는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저 푸른빛에 몸을 푸욱 담그면 아주 신비로운 마법이 열리지. 그 마법은 온몸을 저 바다에 던져 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란다."


 정이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바다를 끌어안았다. 온몸을 던져야만 살아 숨 쉬는 진짜 자신을, 살아 숨 쉬는 진짜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정이는 다시 배웠다. 한없이 깊고 찬란한 바다의 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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