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니 음악도 무엇도 듣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알차게 포개진 지하철 안에 꼿꼿이 서 있으니 책을 읽지도, 핸드폰을 편히 하지도 못 해 애쓰지 않고 서 있었다.
한 줄기 콩나물이 되어.
이어폰도 핸드폰도 없이 무념무상으로 서 있으니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낮은 음성이었다.
소리가 작은 편이어서 주의를 조금 기울여야 말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하지만 말투가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 더 집중하게 만드는 말소리였다.
"승객 여러분,
지금 에어컨을 꺼달라는 민원과 반대 민원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퇴근시간인 만큼 우리 열차에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열차의 에어컨은 객관적인 열차 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됩니다. 추우신 분들은 외투를 가지고 다니시며 다수를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모든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실제 방송에 나온 말은 내가 적은 말보다는 조금 더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주는 말이었다.
그 순간 덥지도 춥지도 않았던 사람으로서 듣기에 양쪽의 민원이 들어온다는 점, 기관사 개인의 뜻이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나 객실 상황에 따라 에어컨이 작동된다는 점, 더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보다는 추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더 간단한 공존 방법을 다 담고 있는 친절한 안내방송이었다. 동시에 기관사의 입장과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배려를 다 담고 있어 인간적이고 정중하기도 한 안내방송이었다. 그 따뜻하지만 의미가 분명한 안내방송을 들으면 민원을 제기한 사람도 수치스럽지 않게 좀 더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신대방역에서 구로디지털단지 역으로 가는 길에 또 방송이 나왔다.
"승객 여러분, 우리 열차는 구로디지털단지로 가고 있습니다. 이 길에는 양쪽에 벚꽃이 멋지게 피어있으니 핸드폰만 보지 마시고 고개를 들어 벚꽃도 한번 보세요."
역시 부드러운 말투에 따뜻한 음성. 이건 거의 지하철 안내방송이 아니고 감성라디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어느덧 어스름이 내려 어두워진 도시에 함박눈 구름처럼 펼쳐진 벚꽃길이 지나갔다.
이 삭막한 도시의 풍경에도 봄은 그렇게 내려와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만 보지 말고 고개 들어 창밖 꽃길을 한번 보라는 그 말은 핸드폰과 바쁨으로 가득 찬 도시의 삶을 공유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멀리 펼쳐진 벚꽃을 보는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못 듣거나 저마다의 이유로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못 본 승객들도 있었지만 몇몇 승객이 고개를 들어,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