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나를 만나는 시간
"바빠? 통화하기 힘드네."
평일 저녁 8시 이후 전화를 받지 않는 나에게 가족과 지인들이 하는 말이다. 부재중 전화에는 전화로 답하는 게 예의란 건 알지만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연락해도 괜찮겠냐' 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이건 퇴근 이후에는 관계 속에서 잠시 멀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는 작은 선언이다.
선언과 별개로 평소 통화보다는 메시지를 선호한다. 내가 가능할 때 답을 해도 무방한 메시지와 달리, 즉시 반응을 해야 한다는 통화의 특징이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져서다. 특히 스스로 '쉬겠다' 정해놓은 늦은 밤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상대가 그 누구라도 (미안하지만) 썩 반갑지 않다. 누군가 노크 없이 방에 불쑥 들어오는 것만큼 신경을 쭈뼛 곤두서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종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원치 않는 관계에 연결되어 있다. 카톡창에 쌓이는 미처 다 읽지 못한 메시지, 처리해야 할 메일, SNS, 광고, 경쟁하듯 쏟아지는 뉴스와 새로운 정보들. 내리막길을 구르는 돌처럼 바삐 달리는 세상의 속도를 쫓다가 잠시 멈추면 '난 누구? 여긴 어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들여다볼 작은 틈을 갖기도 어렵다.
더욱이 나는 직업상 무시해도 좋을 광고조차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레퍼런스로 삼을만한 광고 소재가 눈에 띄면 반사적으로 캡처한다. "이거 내일 APP푸시 보낼 때 써먹어야지." 생각한다.(생각아 멈춰라 제발!) 광고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콘텐츠들이 내게는 자극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새에 이미 머릿속에서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이 되고 있다. 관계와 일로부터 '로그아웃'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나에겐 8시 이후 핸드폰과 연락을 가능한 한 멀리하는 일이다.
핸드폰과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흙탕물이 가라앉듯 하루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불편했던 사회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로 거듭난다. 시간의 주도권이 내게로 돌아온다. 그제야 간신히 내게 남아 있는 감정과 생각들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 내게서 무엇을 걷어내야 하고, 또 채워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경쟁하듯 무작정 취하기 전에,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망하는 틈을 갖는다.
나를 지킨다는 것은 외부의 모든 자극을 막고자 스스로를 비우는 고립이 아니다.
내부를 좋은 것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中
나를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된 지금, 책 읽기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인 동시에 나와의 대화이다. 책 속에는 분명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지만 사실 나를 읽는 행위다. 책 속의 문장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는다. 나만의 속도로 책을 읽다가, 생각에 잠기고, 원하는 만큼 멈추고, 줄을 긋거나 책 귀퉁이를 접는다. 그 속도는 온전히 내가 정한 속도이다. 속도의 주도권이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내 중심이 조금은 더 단단해진 것 같은 자신감과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바쁜 하루였다. 내일도 바쁠 것이다. 그러니 우리 하루 중 단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내가 정한 속도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자. 그 도구가 꼭 책이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