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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스 Feb 02. 2022

직업은 직장보다 크다.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하기

"무슨 일 하세요?"

"S 모 기업에 다닙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음악을 하냐 묻는다. "SM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것만큼 매끄럽지 않은 대화의 전개다.


성인이 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직업 소개를 빼놓을 수 없다. 직업 하나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중심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생각 또는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지, 자주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심지어 대략적인 소득 수준까지도 가늠이 가능하다. 간혹 직업 대신 누구나 다 알만한 회사 이름만을 소개하는 분들을 만난다.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잠시 멈칫하는 제스처를 취하게 되고, 동시에 갖가지 추측과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매운다.  


번뜩 떠오르는 추측들.

똑똑하고 성실하실 것 같다. 입사하기 힘드셨겠다.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이구나.

동시에 주제넘은 오지랖이란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편 이런 노파심이 고개를 든다.

맡은 직무가 소개하고 싶을 만큼 만족스럽지 않은가.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 직장을 얻는 게 성공의 기준이라 여기시나.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고 계신 걸까.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자본주의 시대에서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하기란 어지간히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몇 달치 월급을 털어 가방을 사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5년 할부로 독일산 자동차를 산다.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기준이 곧 내 좋음의 기준이 된다. 나의 진실된 실재(實在)는 흐려진 채로.


다른  몰라도 ''만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서는  된다고 나는 믿는다. 타인의 눈을 의식한 소비는 후회하더라도 회복이 가능하다. 돈이야 (힘들겠지만) 다시 벌면 되니까. 하지만 일은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나의 시간,  삶을 쓰는 영역이다. 우리는 운이 좋으면 하루 최소 8시간을 일하는  사용한다.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하며 보내는 셈이다. 직업은 사회와 관계를 맺는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일은 나라는 사람의 무늬를 만든다.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세상의 인정을 얻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면,  사람의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있을까.


삶을 일 속에 전부 담아낼 수는 없지만 '일은 일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 우리 삶에서 일의 몫이 너무 크다. 일하는 나와 살아가는 나, 돈 버는 나와 쓰는 나를 나누어 살아가면서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나는 일 욕심이 많고 인정 욕구도 강한 편이다. 회사 일과 별개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벌리고, 수습하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진짜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지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많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미련하게 무리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언가 서걱거리고 부자연스럽다고 자각될 때, 속도를 줄이고 진짜 내 속마음을 마주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 내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동안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화자의 말에 나를 반추하고, 책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나의 민낯을 마주한다. 나의 가장 지질한 모습을 만나게 되지만 부끄럽지 않다. 내 비밀을 폭로할 사람도, 나를 비난할 이도 없으니까. 오히려 후련하다. 나에게 솔직해지는 시간은 나만의 '좋음'과 '바람직함'의 기준을 만드는 수련의 장이기도 하다.   


'바람직함', '해야 함', 그리고 '좋음' 등은 '우리'의 것으로 존재하면서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비율을 잘 맞추어 누구에게나 적용되도록 제단 된 이념이지요. (중략) 그 '바람직함'을 정할 때 직접 참여해 본 적 있습니까? 왜 자기가 참여해서 정하지도 않은 것을 위해 죽어라 봉사합니까? 왜 그것을 자신의 내적 충동보다 더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보십니까?
<인간이 그리는 무늬> 최진석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의 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무게추가 타인의 눈으로 더 기울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책에 의지한다. 인정에 목마른 영혼을 깨워줄 도끼같은 문장들을 만나길 기대하면서.       



참고도서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인간이 그리는 무늬>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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