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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기자 Dec 31. 2018

추억은 방울방울 덴마크 명물 '설국열차'

코펜하겐으로 떠나는 증기 기관차

12월 17일 공식적인 수업이 끝나고 1만 자 소논문 작성에 들어갔다. 성탄절 관련 관광상품을 골라 Research Question을 설정하고 Interview, Observation, Survey 등을 디벨로핑해서 짧은 논문을 작성하는 과제였는데 2인 1조로, 난 미국인 친구와 한 조가 됐다. 이 친구가 먼저 제안한 토픽이 Denmark의 'Veterantog (Vintage locomotive)', 즉 증기기관차 관광상품이었는데 최근 경험한 여행 중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압도적인 경험이라 글을 쓰게 됐다. 그 뒤로도 학과 친구 2명을 포함한 지인들에게 덴마증기기관차를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18일 프로포절 제출도 끝냈겠다, '진짜' 논문 Literature Review를 하고 찬찬히 다른 업무를 보면서 우아하게 연말을 맞고 싶었는데 1만 자에 책자 가본 2000자까지, 그것도 내 논문 주제와는 무관한 주제를 잡고 연말연초까지 늘어져야 한다니 대체 어떤 사람이 커리큘럼 디자인을 했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니나다를까, 실력 좋고 잘 가르치지만 평가와 피드백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Ph.D가 있는데 그 분이 커리큘럼을 짰다고 한다) 불평도 잠시, 일만 자를 어찌 다 쓰나 막막했는데 짬밥이 늘어선지 일주일만에 5500자를 결국 혼자 다 썼다. (미국인 친구가 태업이 너무 심해서 짜증나는 일이 많았다. 2달 동안 내가 5000자 넘게 쓸 동안 이 친구는 500자만 달랑 쓰고 지금도 안 쓰고 있다ㅎㅎ 아이고 의미 없다)


성탄절 전 주에는 마지막 method (observation)를 해치운단 핑계로 덴마크 크리스마스 증기 기관차에 몸을 실은 채 (왕관 로고마저 영롱한) 초록 맥주병, 내 사랑 투보그 Tuborg를 들고 거나하게 취해 기분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좋다)



NorthSealand에서 운행하는 이 Veterantog (Vintage Train)은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1900년대에 만들어진 골동품 수준의 실제 증기 기관차를 그대로 활용한 관광상품이다. 사시사철 상시 운행하지만 해마다 성탄절이면 Juletog (Juledamptog 라고도 부른다, Christmas Train 즉 성탄열차라는 뜻)를 특별 운행한다. (2018년)는 12월 15~16일 양 일간 운행됐다. 주로 공식 홈페이지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온라인 티켓 예약을 받고 인기가 많으니 미리 표를 구매해야 한다. 실제 탑승해보니 외국인들보다 현지인(덴마크인 80%, 스웨덴인 10%) 탑승자가 압도적이었다. 지역민들에게 인기인 명물 상품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틀에 박힌 패키지 여행에 신물이 났다면 경험해볼 만하다.


각설하고, 스웨덴 헬싱보리에서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 30분이 걸려 (친구와 나는 그새를 못 참고 배에서 한 병나발을 벌써 불고 있었다) 덴마크 헬싱외르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바로 성탄열차로 갈아탔는데 멀리서부터 검은색 증기를 뿜으며 칙칙폭폭 도착하는 그 자태만으로 주변 분위기를 180도로 바꿔 버렸다.



과거 가축이나 수하물 칸으로 쓰였을 법한 공간은 유모차 전용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사진에서 보듯이 산타모자를 쓴 부모님과 아이들이 산타복장의 스태프에게 안내를 받는다.



구시대 골동품이 뿜어내는 연기(스팀)와 경적소리가 만들어내는 마법같은 순간들은 (인스타그램에서 한 덴마크 승객이 표현했듯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물건이 굉음을 내며 산 짐승처럼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땐 모두가 일제히 탄성을 자아낸다. 기관차 탑승객들뿐만 아니라 플랫폼에서 일반 Skånetrafiken 열차를 기다리던 승객들도 온통 들떠서 기관차 사진을 찍거나 탑승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주 고객은 어린이들일거란 친구와 나의 예상을 깨고 가장 즐거워하고 입이 내내 귀에 걸려 있었던건 부모들, 특히 애 아버지들이었다. 아기들 사진 찍어주는데 정작 자기들이 더 신나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열차 안은 좌석도 좁고 걸으면 옆사람 어깨가 허리에 닿을 정도로 통로가 협소한 편이다. 열차 승무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고 그 당시 복장을 입고 승객이 원하면 빈티지 느낌이 물씬 나는 종이 티켓(위 사진 중 가운데)를 준다.

아래 사진처럼 화장실이 있지만 수돗물은 나오지 않고 변기도 구멍만 뚫려 들여다보면 열심히 달리는 열차 선로가 그대로 보이는 옛스러운(?) 시설을 고집하고 있다. 출발 전 역 화장실을 들러 볼일을 미리 해결하는 게 좋다.


카페테리어가 있지만 간단한 식음료만 판다. 미리 먹거리를 싸오거나 간이역에 내려 근처 레스토랑에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웨딩촬영 같은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칸을 통채로 대여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1,2,3등칸으로 나눠져있는데 위 사진은 일등칸 사진이다. '오리엔탈 특급열차' 같은 클래식 영화에서 볼법한 격리된 방이 있는데 여기서 친구와 다른 맥주 캔을 깠다. 벽이 얇아 옆방 소리가 다 들린다. 숀 코넬리가 나오는 '대열차 강도'가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일등칸이었다.

Veterantog를 탄다면 열차 실내에만 머물진 마시라고 강력히 추천해드리고 싶다. 실외에선 기적소리와 모든 순간을 아련하고 로맨틱하게 둔갑시키는 증기, 기차가 움직이는 굉음과 진동, 바깥 풍경들과 속도감을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바람이 거세도 많은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실외로 사진을 찍으러 나왔다. 아직도 그 매캐한 석탄 연기와 마법 같은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종종 산타클라우스(?)가 돌아다니며 바구니 속 진저쿠키를 나눠준다. 공짜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증기 기관차 주위로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몰렸다. 친구랑 객실에서 '단지 스팀 연기일 뿐인데 무엇이 Servicescape을 이렇게 마법처럼 변화시키는 걸까'를 주제로 반쯤 취해서 노닥거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영화 '불의 전차'나 모네의 '생 라자르역'에서나 느껴지는 아련한 풍광, 스팀연기는 평범한 순간을 한순간에 로맨틱한 Service encounter로 변화시키는 마법 같은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친구와 난 이날 각자 맥주 5-6병에 Gammel Dansk 한 잔을 나눠 마셨는데 어찌어찌 정신차리고 무사귀환했다. 아래 사진들은 그 사투의 흔적들이다. 사실 코펜하겐 시내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그땐 이미 많이 취해있어서 초점이 다 나가 제대로 건진 게 없었다.

역시 대도시는 대도시였다. 코펜하겐 전체가 온통 크리스마스 트리와 데코레이션에 흥청거리는 듯했다. 역사 안에도 아래처럼 차려입은 남자들이 누비며 넉살좋게 행인들과 어울렸다. 무려 편의점에서(!!) 도수가 센 술을 팔리고 있었으며 역 근처 샵 쇼윈도우엔 야한 속옷과 물품들이 보란듯이 전시된 것을 보며 '아, 내가 드디어 도시에 왔구나! 스웨덴 촌구석(?)에선 생각도 못할 일이지'하며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광대가 자꾸만 승천했다.

내 친구는 어머니가 스웨덴인인 미국인인데 얘도 간만에 덴마크에 와서 엄청 들떴다. 헬싱보리는 확실히 스웨덴에서도 촌은 아니고 카페, 영화관, 쇼핑거리나 해변가 등 있을 것 다 있는 중소 도시지만, 도시 크기와는 별개로 다들 그 스웨덴 특유의 '재미없음'에 많이 물려 있었다. 그래서 얘랑 연신 "여기오니 너무 좋다. 솔직히 스웨덴은 너무 노잼이잖아" 이러면서 인파에 섞여 기분 좋게 흥청댔다.

공포의 Gammel Dansk(아래 우측), 다신 먹지 않으리


바로 옆나라인데도 덴마크 사람들은 참 다르다. 이날 펍에서 친구랑 얘기하는데 옆에서 말을 걸지 않나(!) 계속 대화에 끼고 싶어서 눈치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합석할 뻔했다. 4차로 옮긴 다른 술집에선 자리가 파하고 일어나려는데 멀리 앉아 있던 중년 커플이 '넌 어디서 왔니, 말투 보니까 미국 동부..시카고서 온 거 같은데? 우리끼리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맞추는 내기를 하고 있었다'라며 심지어 '너네 무슨 사이니'라고 묻는 게 아닌가. (무슨 사이긴 친구 사이죠) 스웨덴서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라 조금 당황했는데 결론은 덴마크인은 듣던 대로 참 솔직하고 거침없고 시원시원하다. 스웨덴인들과는 판이하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래 (3n년) 유럽에서 사신 박 교수님 말씀대로 "스웨덴인은 일본인스럽고 덴마크인은 한국인스럽다") 8월에 가족여행 오셔서 덴마크에서 같이 회동한 전 직장 선배께선 예의 그 덴마크인들의 무례함(?)에 난색을 하시던데 난 되레 그 괄괄함과 솔직함이 맘에 들었다. 주변 지인들 평가만 들어봐도 극과 극으로 갈리긴 하던데 내가 그간 겪은 선에선 어쨌건 난 덴마크인들이 참 좋다. 과제만 아니었음 덥썩 합석해버리는 건데.



아무튼 이날밤 나는 지독한 숙취에 시달려야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술이 확 올랐다. 늘 그렇듯 맥주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멜 단스크(38도짜리 덴마크 전통주)가 문제였다. 처음엔 향이 아쿠아비트(45도)를 연상시켰다. (둘 다 엄청 향기롭다. 향수처럼) 그런데 가멜단스크는 막상 마셔보니 물처럼 아무 맛도 안나서 방심하고 벌컥 마셨다. 친구 집에서 아쿠아비트를 마신 적 있는데 비슷하게 향이 강하고 대신 매우 썼다.


극 중 어벙한 캐릭터로 나오는 넬슨 반 알덴 요원(죄).


'보드워크 엠파이어'라는 금주법 시대 미국을 그린 미드에 밀주꾼들을 때려잡던 연방요원(넬슨 반 알덴)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서 밀주를 팔다 경찰에 붙잡히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 이 사람 부인이 노르웨이였나 스칸디나비아 출신 여자라서 아쿠아비트를 몰래 만들었고 그걸 남편이 바마다 돌며 팔다가 잡힌 것인데 술집 주인이 진~짜 맛있게 아쿠아비트를 마시면서 "과연 고향의 맛이군"하며 입맛 다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 때문에 아쿠아비트에 대한 기대감이 컸었다. 하지만 너무 썼다. 반면 가멜단스크는 맹물맛이었는데 알고보니 '침묵의 암살자'스러운 면이 있었다. 위액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오래도 속을 뒤집어놨고 두통, 오한, 현기증, 메스꺼움, 전신 근육통, 복통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증세가 다 나왔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숙취가 아닌 다른 질병에 걸린 게 아닌가'하고 침대에 반쯤 실신한채 노로바이러스 증세를 검색했더랬다.


 

내 친구는 이날 그렇게 퍼마시고 또 파티에 갔는데 잘 살아 남았을지 모르겠다. (놀 때 놀고 취할 때 취하더라도 제발 좀 리포트는 쓰자 이 자슥아..) 아래는 내가 찍은 기관차 동영상인데 아무쪼록 간접 체험하시고 많이들 직접 타러 가보셨음 좋겠다. 10명이 타면 10명이 후회를 안 한다는 증기 기관차인만큼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공식홈페이지: Veterantoget.dk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events/2130137527250374/?ti=cl

가격: 왕복 219 Kr. (3등칸 기준/스웨덴 크로나로 환산한 금액임)

소요시간: 헬싱외르~klamborg역 경유~코펜하겐 도착 (약 2시간 소요)

비고: 카페테리아가 있지만 간단한 음료판매/화장실 상태 안 좋음(수돗물이 안 나오니 역에서 미리 해결)/ 주류반입 불가하단 말을 들었지만 친구랑 저는 가방에 넣어가 마셨고 맥주병 (투보그)인스타 인증사진들을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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