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는 무슨 사기를 당했나 생각했다.
입발린 말들에 속아 넘어간 사연이 있나?
제주 방언이라는 게 생각도 못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속아 넘어갔다.'
수고했다는 의미가 어째 저렇게 쓰일까.
수고했습니다. 수고했다. 수고했수다.에서 점점 수괐수다. 소갔수다. 속았수다.
이런 식으로 넘어간 걸까?
아니면 속아 넘어가며 사느라고 고생했다는 유희일까.
인터넷 검색창을 뒤져봐도 명쾌하게 답변하는 글이 없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는 제목에 대한 집착은 사라졌다.
매화마다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대사는 겪어보지도 않은 세월을 온전히 담아 내게도 안겨주었다.
애순 엄마의 강한 성정이 나의 엄마에게도 보였고,
그저 살으라는 말이 서럽게 들리던 애순의 심정이 느껴졌다.
남에게는 그렇게 상냥하던 딸이 하나뿐인 아버지에게는 낙서장 대하듯 한다는 말과
손 흔드는 딸의 모습이 여전히 어린아이로 보이던 아버지의 시선 또한 아프게 다가왔다.
무딘 칼로 속을 헤집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드라마인지라, 순애보 관식이는 내 현실에 없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아이를 키워주는 세상은 이제 없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속 매정한 삶이 내게는 다정하게만 보였다.
다정함으로 위장한 무딘 칼이었다.
깜짝 놀라는 고통이 아닌, 어느새 살이 움푹 파여 피가 고여있는 무거운 고통이었다.
차라리 피가 철철 나면 모를까 시퍼런 멍처럼 여운이 긴 드라마였다.
각자의 삶 속에서 맡은 역할이 버겁고 무너지게 만드는 때가 수십 번도 넘게 오지만
그걸 뛰어넘게 만드는 것은 또 사람이었다.
이 드라마가 내게 준 키워드는 '살아라'였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어떻게든 살다 보면 살아진다.
남편 잃고 숨이 넘어가도록 전복을 캐고, 딸아이 다 큰 모습 보지도 못하고 가야 하는 애순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자 소원이다.
그녀가 아끼는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저 살아라였다.
집에 이사 올 때, 아이를 가졌을 때, 이사 가야 할 때.
때마다 꿈속에 찾아오며 딸을 대신해 그릇을 열심히 닦던 바쁜 손이 애달프게 다가왔다.
그 유언이 애순을 오래도록 지켜왔다.
살라는 말이 무딘 칼로 속을 헤집는 것처럼 무거운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의 엄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을 깊이 헤아려주지 않고 그저 살라고만 하고, 강해지라고만 하는 게 미웠다.
아빠는 몰라도 엄마는 알아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대한 배신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느낀 배신감이 은연중에 지속되어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게 되고,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이건 가족이 해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게 살던 와중에 애순 엄마의 대사가 들린 거다.
그 귀한 전복을 구워 먹이며 손톱도 예쁘게 물들여 주던 모습이 보인 거다.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하던 애순 엄마에게서
우리 엄마가 보였다.
그제야 알았다.
아, 엄마는 최선을 다 한 거구나.
엄마가 된 애순이에게서도, 엄마가 된 금명이에게서도.
그들 모두에게 나의 엄마가 비춰졌다.
나의 무능력함에서 곱게 키운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젊었을 때는 미싱을 돌리고, 산후 조리할 시간도 없이 찬물에 손을 담가가며 장사를 도왔던. 나이 들어서는 요양 보호사로 몸을 혹사시키며 일을 해 퇴행성 관절염을 얻게 된 우리 엄마.
폭싹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