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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Oct 12. 2023

어떤 마음_2.길을 잃었을 때

막다른 마음일 때 우선 기억의 내비게이션에 따른다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길치는 아니다. 10년 넘게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할 때 한번 갔던 취재처의 위치나 주변 모습을 아직도 꽤나 정확히 기억한다. 특히 서울 근교나 외곽의 비슷한 건물들과 풍경 중에 나름의 방점을 찍어 기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폐가구 공장 끼고돌아 30미터라던지, 밭 끝에 파란 지붕 창고에서 좌회전, 국회의사당 바라보고 걷다 지하철역 나오면 오른쪽 보기 등 지도 검색보다는 우선 기억의 내비게이션을 따르는 편이다. (솔직히 이상하게 지도는 잘 못 보는 편이다;; )

나의 기억 지도는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꽤 정확하다.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 등 영상 속 배경이나 장소가 내가 아는 곳이나 갔던 곳이라면  97.5프로 이상 알아챌 수 있는 조금은 쓸데없고 조금은 희열이 있는 재능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이건 재능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학습에 가깝다는 것을 근간에 깨달았다. 나는 길을 걸을 때 그냥 걷지 않는다. 길 주변과 상점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까지 꽤나 구경을 하며 걷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유년 시절에 산만하다는 평가를 자주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데서 연유된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그런데.

그런 내가

길을 잃은 것이다.

출근길이었다.

5년째 다니는 익숙한 출근길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가끔이지만 시지각이 꼬이고 있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흡사 유년 시절 즐겨 봤던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 처럼 폴을 둘러싼 세상이 한순간 멈추고 폴만 움직이고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어느 순간 세상이 조금 느리게 돌아간다고 느껴지며 귀가 먹먹한 상태가 되는데, 딱히 다른 생각에 집중해서도 아니고 멍하게 있다가 꼭 한 번씩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매일 걷던 출근길, 매일 타는 버스를 잘못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최근 몸에 이상이 와서 3개월 이상 정기적으로 출근 혹은 퇴근길에 병원을 다니는데, 정확히  집과 회사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도 많다.  빠르게 진료를 받고 버스 정류장에 서면 많은 버스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한두 개 빼고는 거의 모든 버스가 내가 내리는  정류장을 경유하는 것들이다.


그렇다. 그 한 두 개의 버스 중 하나에 오른 것이다.

여느 때처럼 좌석에  앉아 바깥풍경에 눈을 부려두고 있었다. 그때였다. 신호대기선에 있던 버스가 좌회전을 안 하고 직진하는 것이다. 낯선 도로와 건물들을 보니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모처럼 검색까지 해서 탄 버스이지 않은가.

그 순간 내 몸은 둔해진다. 굼뜨기 짝이 없다. 가뜩이나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인데 판단하는 세포 반응도 더디다. 성격 급한 내가 순발력을 자부하던 나는 사라지고 잘못된 상황을 인지하고 수습해야 하는 나는 멍하게 잠시 노선도만 볼뿐이다. 전혀 해독하지는 못한 채 말이다.

이럴 때 나의 마음은 대개 이러하다.

막막한 마음. 막다른 마음. 갑자기 보이지 않던 낙하물에 부딪혀 머리가 띵한 마음이다. 그럴 때 내 발은 내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내가 살면서 가장 굼뜬 시간들일 것이다.  


두 정류장을 간 다음에서야, 내가 탄 버스는 내가 검색한 버스의 번호와 완전히 다른 번호라는 것을 안다.

다시 노선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하차벨을 눌렀다.


내가 아는 길과 더 멀어지지 않게 일단 내려서 방법을 생각하자.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내렸다.


모르는 길이지만 내가 아는 길을 가는 길은 알 것 같다. 지도를 보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마치 하늘에 지도가 펼쳐진 마냥... 그냥 발이 끄는 대로 다시 나의 우선 기억 내비게이션을 켠 것이다.

잠시나마의 막다른 마음은 다시 열린 마음이 되었다. 낯선 길 위에서는 다시 활로를 찾은 마음은 그제야 식은땀을 닦아낸다. 콧잔등 송글하게 맺혔던 땀도 식는다.

 

일을 할 때도 이런 막다른 마음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막연하다가 막막하고 더 이상 어디도 오갈 때 없는 마음 나아가던 마음이 막다른 마음에 도달했을 때, 하차벨을 눌러 내려야 한다는 걸 안다. 알지만 못할 때도 있다. 잘못된 길인데 내리지 못하고 마냥 타고 있는 느낌이 들 때, 잘못된 길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될 때, 돌아가기 힘든 지점이라 생각될 때라도 내려야 한다. 내가 아는 길과 더 멀어지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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