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식구들 모두 날것과 해산물을 좋아하는데다 뒤늦은 허기를 달래며 모두 허겁지겁 먹느라 어린이날 선물도 어버이 날 선물 증정식이 형식적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맞은편에 앉아계신 엄마가 특히 돌돔과 문어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보였다.
잘 웃는 엄마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고 음식이 미끄러지듯 들어가고 입안가득 음식을 돌려가며 먹는 도톰한 입술은 타인의 식욕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엄마의 입꼬리는 만족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아. 음식을 씹으면서도 웃을 수 있구나. 엄마의 식사는 늘 그랬다. 김치 하나에 밥을 드셔도 바라보는 이의 침샘을 자극하고 한입만을 외칠 정도로 복스럽게 드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엄마 얼굴이 좀 부어있었다. 한쪽 눈도 벌겠는데 혈관이 터져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랬다하시니 안과도 다니신다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당시에는 모든 게 크게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피곤한 모습과는 달리 유난히 기분이 좋으셨는데, 가족들 앞에서 피부 자랑을 하셨고, 미국에 사는 조카들 방문에 여름 휴가를 어떻게 함께 보낼지 계획을 세우시며 들떠 있었다. 언니가 결혼하고 바로 미국으로 이주했기에, 미국에서 나고 자란 손자들과 손녀에 대한 그림움과 애뜻함이각별하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식사를 물리고 다과를 하며 모여 앉아있는데, 오랜 여정의 끝이고 허겁지겁 먹은 탓에 피로가 덮쳐왔다. 집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 때 엄마가 한쪽에서 어버이날 선물로 드린 컴포트슈즈를 신고 벗고 이리저리 살피고 계셨다.
"좀 작은가? 아니 딱 맞는 건가?"
왜그랬을까? 나는 짜증이 확 올라왔다. 말이 곱지 않게 나갔다.
"엄마, 양말을 신고 신어봐야죠! 안맞으면 내가 바꿔오면 되지 뭘 걱정이야!"
엄마는 평소에 다리를 접지르거나 자주 넘어지셨는데, 당시 두번이나 큰 사고로 이어질뻔하기도 했다.
빨리 걷는 것에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작은 키에 상체가 발달한 체형상 그럴수도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무릎도 많이 안좋으시니, 조금 천천히 걸으시라고 조심하시라고 잔소리했지만, 큰 문제라 생각지는 않았다.
엄마는 늘 잰 걸음으로 종종대며 걸으셨다. 멀리서도 엄마가 엄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53cm, 작은 키에 30대에 비해 30키로나 불어난 60대의 거구를 겨우 230cm의 작은 발로 지탱하며
종종종종 앞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은 늘 고단해 보였다. 엄마의 인생처럼 종종대는 엄마의 발걸음이 싫었다.
그래서 모처럼 큰맘먹고 유럽의 유명한 컴포트 회사의 슈즈를 어버이날 선물로 산것이다.
신발을 고르며 엄마 발이 이렇게 작구나. 엄마 발도 엄마 인생 닮아 참 고단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발 선물 하는 거 아니라는데..."
누군가 말했다. 텔레비전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에 섞여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그때도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저 기억하는 건 엄마는 계속 신발을 신고 만지작거리고 말씀하셨는데, 누구 하나 관심갖지 않았던 듯 했다.
며느리 역할을 하고 온 두 딸은 너무 피곤했고, 5살 난 동갑내기 조카와 딸의 놀이소리에 묻혔고, 갓 돌지난 조카가 막 칭얼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보다 더 부엌쪽에 앉았던 남편 증언에 따르면 신발을 참 마음에 들어하셨다고 한다. 한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일 신고 나가야겠다. 안바꿔도 된다고 말하셨단다.
이것이 엄마의 죽음 7시간 전, 9시에서 12시에 일어난 기억속 풍경이다.
그 날 이후 그날의 기억을 습관처럼 복기했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너무나 또렷하다.
마치 기억을 떠올리면 내 몸이 붕 떠올라 그 날 그 시각 그 곳, 친정의 마루에서 쳐다보고 있는듯 장면들이 눈앞에 흘러간다. 그 또렷한 기억속에서 그날은 자주 친정에 모이는 여느 날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다만, 평상시 같지 않던 엄마의 두가지 행동이 가시처럼 걸리는 대목은 있다.
식사를 마친 후, 엄마가 손주들을 한명 씩 불러 꼭 안으셨다. 꽤 오랫동안 이름을 불러주며 껴안은 탓에 아이들이 답답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식사 후에도 늘 부엌에서 종종대던 엄마의 뒷모습이 익숙해서 그 여유있는 잠깐의 시간이 피곤한 내 눈에 보기 참 좋았다. 아마 모두가 쳐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자정이 가까이오자 우리는 일어섰고, 엄마는 현관에 계셨다. 늘 주차장까지 배웅나오던 엄마였는데, 엄마는 현관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양손을 흔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엄마가 못나가겠다. 얘들아 잘들 들어가!"
결혼하고 7년동안 배웅을 안나오신건 처음이었다. 골목에서 차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미련하게 서있던 엄마였는데 그날은 현관에서 배웅하셨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엄마가 못나가겠다. 얘들아 잘들 들어가!"
끝이었다. 엄마의 끝.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그 말이 엄마의 마지막 음성이라는 것을.
그로부터 4시간 후,
엄마는 죽었다. 아니 죽어있었다.
엄마...엄마는 ...왜 죽었을까?
엄마가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난 여전히 지독히 슬픕니다.
'엄마를 잊기 위해, 엄마를 잃지 않기 위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게워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