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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Jan 01. 2022

칙칙폭폭 이별 뉴스레터 - 2

사랑받는 것도 노력이고 선택이었다. 정말 구차하긴 하다.


사랑을 떠먹여 줄 수는 없다. 지천에 사랑이 있어도 내가 먹는 만큼이다. ‘사랑받는다’는 표현에는 주체가 본인이 아닌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 오래도록 착각을 했는데, 요즘 생각에는 없으면 찾아서라도 자신에게 먹여야 하는 게 사랑이다. 


견디고 싸워야 할 게 좀 많은 사람을 가까이서 보아 왔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사람은 항상 애정에 목말라 보인다. 간혹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원망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사람의 감정을 우선해주어도, 힘들게 조언을 해도 본인이 그것을 사랑으로 치환하지 않으면 배려는 으레 그래야 하는 일들이요 잔소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 본인이 원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제대로 받았다는 식이다. 장기적인 관계에서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다. 교류는 일방적이다. 상대에게서 사랑을 갈구하지만, 본인이 사랑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이나 때로 내 모습을 보면 사랑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적인 싸움이 크면 그것에 몰두하느라 주변을 인식하는 폭이나 감도가 떨어지나 보다. 애정이 부족해 자아가 흔들리는 사람은 절박해진다. 지켜야 할 선을 쉽게 넘고는 한다. 남을 내 자아의 확장, 부속품쯤으로 여기고 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상대에게 본연의 삶과 감정과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깊게 파고들어 보면 이게 남자 친구와 헤어진 이유인가 싶다.


사정이 나쁘지 않을 때는 누가 남을 위한 마음 한 켠 못 내어주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상대를 위한 마음의 자리가 빠르게 줄어들어 없어지는 것, 여유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마음의 자리란 생각과 감정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있지 않고 타인이 느끼는 감정과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 용서, 용납, 긍휼, 하다못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에너지의 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 자리가 없음을 반복해서 느꼈고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것은 달걀과 닭의 문제로,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과 그 사람이 본인 문제에 매몰된 사람이라는 것 또는 내가 그런 포지션을 자초했다는 것 중 무엇이 먼저인지 모른다. 상대의 항변도 '왜 이해해주지 못하는가'였던 것으로 보면 서로의 불만은 같은 맥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기 중에, 자연에, 도처에 있다고 성경에 쓰여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도 적혀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니, 세상이 그 사랑을 내포하는 셈이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결국엔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행적, 또는 그 사랑도 지금 살고 있는 시간 속에 역사로 남아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은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었고, 어쩔 때는 존재 자체로 힘이 되고는 한다. 친구가 카톡으로 안부를 묻는 것, 기꺼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모두 사랑이다. 나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있어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어찌어찌 연결된 누군가의 사랑이 있어서 가능하다. 이렇게 손을 뻗어 잡으려면 많은 사랑을 마다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급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게으름 또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연애 유튜브를 보다 보니 '사랑받은 사람은 티가 난다, 어딜 가도 사랑을 받는다, '는 말이 참 많았다. '나는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서 출발선이 다르고, 이미 타이밍을 놓쳤으므로 억울하다'는 댓글도 많이 봤다. 나도 동감이었다. 사랑이 많은 가정에서 편안한 성정으로 큰 사람들과 연애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니, 이거야 말로 흙수저와 금수저의 대결구도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더라도 각박한 주변 환경에서 감사함을 찾는 사람들이 있더라. 참 신기하지. 하물며 날 위해 자길 희생했다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애정결핍이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손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사랑을 인식할 수 있고, 집어먹을 줄 아는 사람인가?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현상들을 사랑으로 치환하는 수고를 감당할 것인가?







얼마 전에 일어난 아빠와의 마찰이 생각났다. 나는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마음이 들지 않았고, 이것을 사랑이라 칭하고 받아들이라는 아빠가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나는 해석해야 하는 아빠의 사랑을 받아먹는 수고가 구차하게 느껴져 하기 싫었다. 아빠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주는 게 어느 정도는 의무라 생각해서 정당하게 요구했다.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싸가지 없는 딸이 됨), 나는 포기하는 게 양쪽에게 좋다는 걸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받는 것도 노력이고 선택이었다. 정말 구차하긴 하다. 그래도 자신을 '사랑받는 딸'로 만들려면 정신승리도 꽤나 현실적인 전략이고 (아예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니니까, 이것은 확실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고도의 능력이 필요한 일인 듯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성경에서 많이 본 인자와 긍휼 mercy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보였다. 긍휼은 마음의 자리를 상당 부분 내어 주어야 하는 일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이해를 넘어 공감을 해서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낄 때까지... 아아아주 깊고 오랜 과정일 것 같다. 예수님은 그 긍휼을 행동으로 옮겼다. 일방적으로 자기 안위만 찾는 태도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긍휼의 몰입, mercy의 엑기스 또는 결과는 구원이 아닐까. 꼭 신앙 이야기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나에게 공감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 행동을 큰 구원이나 작은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친구가 자기 할 일 제쳐두고 '너 무슨 일 있어?' 하고 걱정스럽게 물어봐 주는 게 구원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부모님이 보여주는 희생이 (그들의 안위를 생각할 때면 답답해 보일 때도 있지만) 나에게는 매일의 구원이고 그건 당연히 사랑이다. 


나를 위해 쓰여야 할 시간과 힘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게 사랑인 것 같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과정을 구차하다고 느끼는 건 게으른 자의 변명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사랑을 줬을까?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기다렸던 과정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맘대로 상대를 주무르려고 했던 면도 있었지. 잘 모르겠다.




- 이별 뉴스레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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