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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Jan 05. 2022

이른 새벽의 인천 공항

가을 일기 - 1



아…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미치겠네…



자정에 드라마를 켰다. 친구와 몇 시간째 통화를 하고 방전이 와서 그랬나 대화 내용 중에 유미의 세포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걸까. 늦은 밤이나 뭔가에 지쳐 여력이 없어지면 안 그래도 없는 자제력은 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얼마 후, 사납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딸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집 안까지 조용히 올라와 주길 바란 건 무리한 요구이겠지. 한 술 더 뜬 아빠는 전화 너머로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달했으니 짐 가지러 밑으로 내려오란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가지 않았다. 몇 분 후 건물 앞에서 벨이 한 번 울리고, 이윽고 현관문 벨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아, 정말. 아빠 비밀번호 다 아시잖아요. 혼자 기대하고 혼자 골이 난 나는 잠이 덜 깬 것을 빙자하여 양껏 툴툴대고 마지막 짐을 챙기느라 분주한 아빠를 모른척했다. 지나간 세월 동안 깎아낸 욕심이 아직도 크다. 나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어스름한 새벽하늘 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의 행렬을 물끄러미 보던 아빠가 기댈 자리를 찾는 내 머리통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어깨를 내주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꼭 잡는 것이었다.





공항은 잘 꾸며져 있었다. 바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들른 카페에서 당근 케이크 한 조각과 차이 라테를 주문했다. 별생각 없이 빨대를 쪽 빨고는 진심으로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세상에 맛있는 건 꽤 많지만 진심으로 맛있는 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참 뜬금없는 타이밍이다. 건너편에 앉은 아빠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아들로서 친구로서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화는 나중에 하시고 얘기 좀 하자고 하니 아빠는 퇴사하고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내던 친구에게 법인 카드로 밥을 사 먹였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이번에는 친구의 법인카드로 호사를 누렸다며 따뜻한 아릿함을 느끼는 듯했다 (감동적이긴 한데, 두 분 그래도 되는 거야?). 가족 얘기, 한국과 캐나다 얘기, 두 손을 맞잡고 잠시 기도를 하고 나니 게이트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아빠에게 무언가 사달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비싸고 따뜻한 밀크티는 역시 맛있었다. 잔돈까지 용돈으로 챙기는 딸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우연히 들어간 카페가 맛집인지 아닌지 확정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아빠가 떠난 후에도 남아있을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밀크티를 홀짝이는 사이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우리는 송별의 절차를 능숙하게 치렀다. 포옹을 한 번 하고, 비행기표와 여권을 확인받고 돌아보는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사라지다 불쑥 내민 손이 인사하는 것 까지 보고서야 나는 뒤돌아섰다. 공항의 큰 창으로 가을 햇살이 점점 더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점찍어뒀던 공항 서점으로 발을 옮겼다. 여행의 기대감과 권태와 책 냄새. 초등학생 때 기차에서 볼 만화책을 고르던 느낌이다. 그때 나는 대체 고속버스 터미널에 누가 책방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 시의적절성과 어른들의 혜안에 경탄했었지. 긴 빈 시간을 앞둔 여행객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다니, 사막에서 죽어가는 이에게 물 한 대접 떠주는 성인만큼이나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항 서점에서 꽤 많은 책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가는 여행길을 앞둬서인지, 이 서점이 자본주의 수요와 공급에 부합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어서인지, 특별히 분류가 잘 되어있고 지역화폐 결제가 가능해서인지 모르겠다. 아빠를 보낸 오늘의 기억을 가져가고 싶기도 했던 것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역화폐 충전이 먹통이라 소설과 비소설 한 권 씩을 사들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다. 몇 년간 시간 대비 효율적이라 생각해서 비소설만 읽어댔다. 그것도 대부분 자기 계발서. 빨리 똑똑해지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러기 싫다. 한국에 온 지가 벌써 세 달이 되어간다. 처음으로 담임으로 일한 지도 두 달 남짓. 힘들다. 아이들도 좋고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고 동료 교사들도 친절하지만… 벅차다. 문제의 진단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두려움이라는 아주 식상하고도 범인류적인, 아니, 범현대인적이고 범한국인적이고 범케이장녀적인 원인이다. 능력 부족-감이라는 만성질환에 좀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아닌가, 그냥 생리 첫날이 원인인가. 집에 가는 길에 중고서점에 들러 구병모 소설 4권을 충동구매했다. 허울 좋은 변명이 있으니 오늘은 학교 일은 생각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내가 뭘 해도 진단 또는 해석 않고 넘어가 주기로. 지난주는 너무 버거웠어. 



집에 와서 소설책을 마저 읽다 결국엔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휴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까 불안해져 퍼뜩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휴… 딴딴하고 무거워진 머리로 두 눈을 감았다 뜨기를 한참,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일어나 청소기를 후루룩 돌렸다. 책을 좀 더 뒤적이다 가구 위치를 옮기자던 결심을 기억하고 실행에 옮겼다. 노동요를 찾다 칠포 재즈 페스티벌 라이브 방송을 발견했다. 



새벽이라 추울 것을 예상해 목도리를 꺼냈는데 갑자기 들이친 한파에 더욱 적절한 선택이 되어 좋았다. 아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휴일이 하루 더 남았다는 게 좋고, 오늘 아무 일도 안 했다는 게 좋고, 우연히 찾은 재즈 공연이 너무 좋아 감사하다. 오랜만에 소설책을 읽고, 북세권 플렉스를 했다. (중고서점과 교보문고와 도서관! 우와.) 커피를 마시며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쓴다. 빈자리가 생겨 살짝 춥지만 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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