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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Jan 16. 2022

외할미와 뒹구는 주말

가을 일기 - 2


밤늦게 외주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났다. 원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지난 며칠간 작업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난장판을 쳐 놓은 집을 정리하고 나니 그냥 집에 퍼질러 있고 싶어졌다. 테레비, 라디오 친구랑 매일 노느라 심심할 새 없다는 외할미 목소리를 떠올린다. 맘을 다잡고 지하철 개찰구 앞까지 도달했건만 교통카드가 없구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가는 마음이 복잡하다. 딴생각이 들세라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빠르게 30여 층 가령 되는 거리를 올라갔다 내려왔다.





가는 길 내내 영상 편집을 하느라 예쁜 가을날 구경할 생각도 못 했지만 간만의 취미생활이 꿀같이 달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느지막이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구경하며 외할미댁으로 걸어갔다. 환하게 반기는 외할미 뒤로 집안이 어둡다. 옆집이 줬다는 작은 고추 다발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불을 탁, 켰다. 할머니 눈 나빠져요. 울 엄마가 맨날 나한테 하던 잔소리를 엄마의 엄마에게 하다니, 살짝 우쭐한 기분이 든다. 학교 생각을 애써 떨쳐내고 손녀딸의 본분을 따라 때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약간의 밥값으로 작은 꼬치를 똑똑 따서 깨끗이 씻었다. ‘니 할일 해라. 핸드폰 들여다봐라’는 말씀을 따라 안마기를 두드리는 할머니 등에 등을 맞대고 누웠다. 젊은이의 소행을 하던 중 전에 보고 점찍어 놓은 마카롱 집 사진을 할머니께 보여드렸다. 놀랍게도 할머니는 이거 티비에서 봤다며 마카롱을 알아보고는 작고 단 음식에 관심을 가지셨다. 내친김에 함께 디저트 가게로 갔다. 중간에 와플 집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자 할미는 사주고 싶은 눈치였다. 기민한 나는 애플 시나몬 맛을 하나 주문했다. 저녁 먹고 노나먹어요. 할미는 와플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앉아 계신다고 했다. 쉬고 싶은 눈치였던가. 와플 가게는 집에서 겨우 한 길 차이나는 거리였다. 아무리 허리가 아프다 해도 산책 좀 하시라는 타박이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작고 달고 비싼 마카롱을 두 개 사 왔다.






저녁을 먹고 할머니는 자연스레 티브이를 켰다. 화면에 시선을 쉽게 빼앗기는 나는 사람이 조금 멍해졌다. 할머니는 잘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나는 대부분의 신경이 티브이에 잡혀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다. 세수할 물을 끓여놨으니 얼른 화장실에 가라는 말에 대강대강 얼굴을 씻고 나오니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제대로 씻은 거 맞냐는 의심 어린 눈초리가 엄마랑 똑같다. 할머니도 엄마와 피부가 비슷한가. 내 얼굴엔 기름이 적어서 금방 씻긴다는 변명을 했다. 티브이에 잘 홀리는 내 성향이 싫어서 나는 할머니 세수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문득 이 모습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이상한 걸까. 캐나다에 있을 때, 엄마 손을 주물러주다가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워질 것 같아 울컥하는 때가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닮은 점을 찾아낼 때마다 세상에 아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이 마음이 넉넉해진다. 엄마의 모습이 할머니에게서 보일 때 어린 엄마를 알게 되어 좋고,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이 할머니에게서 보일 때 할머니를 더 알게 되는것 같아서 좋다.




- 가을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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