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도 생각도 없이 무작정 떠난 슈베린 여행
독일에 와서 두 달 정도 살면서 항상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이런 얘기를 많이 듣곤 했다.
넌 그래도 유럽에 있으니까 여행도 많이 다닐 수 있고 좋겠다!
사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금요일 밤마다 버스를 타고 프라하던, 바르샤바던 평소에 이름만 들어봤던 낯선 도시들로 여행을 떠나서 사진도 찍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돈이며 숙박이며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다가 귀찮아져 집안에서 빈둥거리다 보니
금요일만 되면 회사가 끝나고 새벽 늦게까지 감자칩을 먹으면서 배틀그라운드나, 오버워치나 하고 있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버렸다.
같이 인턴을 나왔던 다른 친구들은 정말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12시 즈음 느지막이 일어나서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다 보면
분명 어제까지 같이 회사에서 일을 하던 친구들이 파리에 있거나, 포르투에서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속으로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고, 침대에 누워서 인스타그램이나 스크롤하고 있는 나 자신이 좀 한심해 보였다.
문득 진짜 이렇게 지내는 건 너무 유럽에 나온 티를 안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씻지도 않고 제일 빠른 기차를 찾아 카메라를 챙겨 무작정 2시에 슈베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었다.
'슈베린에 성이 있다더라 그리고 매우 예쁘다더라'라는 카더라 통신만 믿고 목적지를 슈베린으로 정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슈베린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슈베린에 뭐가 있는지 찾아보지도 않았었다.
원래 여행할 때 계획도 잘 안 세우고 기차역에서 내려서 어디가 되든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서 걱정되진 않았다.
기차 안에서 슈베린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나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크롬 앱을 켰는데, 함부르크를 조금 벗어나자
인터넷이 터지지 않았다. 그냥 슈베린에 내려서 직접 보기로 결심했다.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탔을까? Schwerin Mitte역에 도착했다.
원래는 Schwerin-Hauftbahnhof(슈베린 중앙역)에서 내릴 생각이었지만.
달리는 기차에서 건물들 너머로 성처럼 생긴 건물이 보이길래 무작정 중간에서 내렸다.
아직도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았지만, 여느 독일 도시랑 비슷하게 큰 성당이나 교회 근처에 가면
뭐라도 볼만한 것들이 생길 거란 직감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슈베린에는 4시가 좀 넘어 도착했지만 돌아가는 기차가 7시 30분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필이면 이럴 때 또 인터넷까지 말썽을 부려, 길을 외우면서 성을 찾아가야 했다.
도시는 생각했던 것처럼 한산했다. 성이 유명하긴 하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 같이 관광객이 수백 명씩 몰리는
그런 도시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마침 일요일이라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훨씬 더 거리가 휑하게 느껴졌다.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나자 성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났다.
황금색으로 장식된 성이 저무는 태양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성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만큼 크진 않았지만 정면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니
화려함에서 나오는 압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성은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고, 호수 둘레로 꽤 큰 호수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성을 구경하러 두 시간씩 기차를 타고 와 연신 감탄하며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내 뒤로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강아지와 함께 프리스비를 하며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성만 찍고 싶었는데, 공원에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차라리 사람이 없는 뒤쪽으로 가볼까? 하고 호수공원 길에서 벗어나 작은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에서 무성히 자란 갈대를 해치고 나가자 작은 부두가 보였다.
배 타는 사람들의 그림이 보이는 걸 보니, 조정할 때 사용하는 곳 같아 보였다.
마침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호수가 많이 얼어있었고, 때문에 운영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부두에 걸터앉아 노래를 들으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앉아서 노을이 드리운 성을 바라보고 있으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더 허세를 부리고 앉아있다가는 입이 돌아갈 것 같았다.
게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되어 서둘러 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아무 계획도 없이 나왔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맑은 날씨에 기차표도 저렴하게 구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독일에 살면서도 항상 파리, 바르셀로나 그리고 잘츠부르크 같은 다른 도시들로 떠나는 여행만 생각했었는데,
이번 계기로 독일 곳곳에 작고 예쁜 소도시들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괜히 멀리 있는 도시로 여행 간다고 머리만 굴리다 포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가까이 있는 도시로
자주 돌아다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