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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준 Dec 06. 2019

나 20대 청년인데,,,

내 동년배들 다 등산 좋아한다!!

때는 2018년 2월 2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주말에 뭐 할지 동기와 얘기하고 있었다.

"함부르크에서 3시간 거리에 독일 띵산이 있다던데..." 


이 얘기를 들어준 게 화근이 되어 동기 놈은 10분에 한 번씩 등산 찬양을 시작했다. 

"가자... Harz Nationalpark..."

독일에서 맥주 먹고 소시지 먹었다는 사람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산 타고 다녔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국토의 70%가 산인 나라에서 온 나도 올라가 본 산이 고작 대모산이나 청계산 정도뿐인데 무슨 독일까지 와서 산을 타고 다니나 싶었다. 동기 놈의 찬양은 술이 들어가자 더욱 심해졌다. 법인장님이 자기는 잘 마시지 않는다며 준 위스키 한 병이 방에 있었는데 대뜸 방에 놀러 와 혼자 술을 홀짝홀짝 마시더니 새벽 3시에 출발하면 오전 중에 등산을 마치고 저녁에 딱 집에 돌아와서 꿀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동기 놈은 방에서 주섬주섬 배낭과 롱패딩을 챙겨 내 방에서 잠이 들었다. 나를 함께 끌고 가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함부르크 지하철은 주말엔 24시간이라 지하철 핑계도 댈 수 없었다...존나 깜깜해

결국 새벽 3시쯤 잠에서 깨 대충 이를 닦고 머리만 감은 채 집을 나섰다. 

동네가 함부르크 중심가가 아니라 근교에 있어 꽤 한산하다는 건 알았지만 새벽에 나와보니 괴한한테 칼빵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하철엔 등산을 가겠다고 배낭과 카메라를 맨 우리를 제외하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무리와 이미 내려야 할 정류장을 한참 지난 것처럼 보이는 취객들 뿐이었다.

갑자기 쏟아진 눈이 겨울 등산의 맛을 더해주었다...ㅅㅂ

막상 역에 도착해보니 동기 놈이 설명했던 것보다 산에 가는 방법이 꽤나 복잡했다.

하르츠 국립공원은 독일의 니더작센주와 작센안할트 주에 걸쳐있어서 교통비만 묻고 더블로 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 입구에 가기 위해선 함부르크-브레멘-하노버-바드하르츠부어그-버스로 총 4번의 환승을 거쳐야 했다. 그렇지만 새벽인데 배고프면 안 된다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는 동기에게 욕을 박을 순 없었다. 물론 내가 그 도시락을 보기 전까지.

바나나, 모닝빵, 생 파프리카

3시간이면 도착한다는 그 녀석에게 속아 기차를 바꿔 타며 역에 내리니 이미 시간은 8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그래도 막상 역에 내려보니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게 꽤 유명한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허나 대부분이 스키를 들고 있는 것을 봐선 우리와 행선지가 같진 않은 모양이었다. 

거의 간이역 수준의 Bad Harzburg Hbf


응 똑같아~

그런데 한 무리의 스키부대가 우리와 똑같은 버스를 타고 등산로 입구에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경사진 슬로프에서만 스키를 타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양반들은 말로만 듣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었다. 정상까지는 8.1km... H&M 겨울 세일로 15 유로 주고 산 물이 숭숭 들어오는 싸구려 워커를 신은 두 사람 사이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신나게 스키를 타고 등산을 시작했다. 

아지매...치트키는 밴이요

사실 벌써 1년 정도 지난 일이기에 등산하던 중 에피소드는 많이 기억나지 않지만 "춥다."와 "예쁘다."를 가장 많이 뱉었던 날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브로켄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정말 예뻤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 숲이 아니라 실제로 나무들이 커봐야 사람보다 좀 더 큰 독일가문비나무로 이루어져 길도 잘 보이고 나름 이국적인 분위기도 났다. 그대로 잘라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무줄기가 안 보이는 이유는 눈으로 덮여 버렸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찍은 나름 베스트 샷 중 하나

산 중턱 즈음 올라왔을까 등산로 옆에 작은 철도가 보였다. 하르츠 국립공원 내에 브로켄이라는 산 정상에 과거 동독의 레이더 기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물류 운반 때문에 과거에 쓰던 철도겠거니 싶었는데 조금 올라가다 보니 뒤에서 츅츅 기차소리가 났다.

세상에 증기기관차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보니 살짝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하이킹을 시작한 지 약 2시간 정도가 지났는데 거세게 내리는 눈 탓에 반 정도밖에 올라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 기차를 탔으면 이미 정상에서 소리 한번 지르고 내려오고 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약 4번 정도 지나가는 기차를 더 마주쳤던 것 같다.

눈이 온 등산로를 덮는 바람에 선로와 등산로의 경계가 애매해서 기차가 올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기차가 가는 길을 내줬던 일이 많았다. 사고가 날 법도 한데 저렇게 운영을 계속하는 걸 보니 역시 독일은 독일이었다.

등산을 시작한 지 약 4시간 정도가 되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까지 올라오느라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 우리는 정상에서 서로가 놓인 처참한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기 놈의 입술은 건조하고 찬 산바람을 이기지 못해 터져 선지 같은 붉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고

녹은 눈을 막아내지 못한 H&M 워커를 신은 나의 발은 가부키 배우의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생파 프리카와 빵 조가 리 몇 개로 연명하던 우리의 위장은 당장 먹을 것을 넣으라며 꾸르륵 꼬르륵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박한 독일의 산에선 뜨끈한 국물 따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소시지와 감튀가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기념품 가게 입구가 막혀버렸다.
저 망할 워커는 아직도 우리 집 신발장에 박혀있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문득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단 내려가 보자 싶어 다시 짐을 챙겨 발걸음을 뗐지만 차마 10분을 못 가 둘 다 기차를 타야겠다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할 수 있었다. 실족사의 각이 90도로 날카롭게 섰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편도가 30유로(한화 4만 5천 원 정도) 했지만 돈을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기차 안은 춥고 눅눅하고 시끄러웠다. 모두가 피로에 절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우리 역시도 김이 서린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어느새 눈을 뜨니 기차는 고슬라라는 작은 중세도시에 도착해 있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아뿔싸 원래 처음 도착했던 바드 하르츠부어그와 산을 두고 정 반대의 도시로 내려온 것이다.

한국으로 예를 들자면 경기도에서 산을 올라갔는데 내려와 보니 충청도인 그런 경우였다.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알아보니 못해도 저녁 8시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뭐라도 시간을 때워보기 위해 터벅터벅 고슬라 중앙 역을 나와 시가지를 거닐다 작은 양조장을 발견했다.

혹시나 따듯한 수프라도 있을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와 동기 놈의 꼴이 마치 주막을 털러 온 도적놈 꼴이었지만 테이블을 잡고 

메뉴판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양조장 안은 감자와 맥주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따듯한 수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바나나 바이젠은 사랑이다.

감자와 고기

그것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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