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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Nov 03. 2020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고민에 빠지다

우리 사전에서 '여행'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여행의 이유》 중에서


인간이 다른 유인원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가 이동의 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바로 코비드 때문이다. 전 세계가 지구촌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누구라도 한 번쯤 해외여행을 다녀왔거나 여름 휴가 계획으로 잡는다. 나 역시 그랬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 입사한 이후로 3년이 되도록 여름 휴가 한 번 제대로 못 가서 올 4월에 북유럽 여행을 가려고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2월 말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아시아권에서 유럽, 미국까지 확산되어 결국 운항이 중단되어 환불까지 받았다.


모두가 향수병에 걸린 환자 같다. 예전 여행 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하며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사람도 있고, 지도를 다시 펼쳐보며 언젠가는 가리라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여행에 관한 독서가 아닐까? 작년에 읽었던 《여행의 이유》를 다시 펼쳤다. 왜 작가는 여행을 다니는 것인가? 작가의 여행에 관한 글로 대리만족할 순 없을까? 책 내용 중 호텔과 관련된 글에서 가장 공감했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다." 《여행의 이유》 중에서 발췌


나는 출장이 좋았다. 회사에 다니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출장이다. 첫 출장을 비즈니스 클래스로 미국을 다녀와서 그런지 출장은 나에게 행복 그 자체였다. 한 직장에서는 고객을 모시고 하와이를 경유하는 라스베가스 여행을 출장으로 다녀왔는데 당장 퇴사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멋진 추억을 만들었다. 그 이후로 최소 한 직장에서 한 번의 출장을 다녀오길 바랐는데 이전 직장과 지금 직장에서 각각 20번에 이르는 출장을 다녀왔다. 그래도 여전히 출장이 좋았다. 


출장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호텔 때문이다. 작가처럼 삶이 리셋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역할이 리셋되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가족들 식사를 챙겨주거나 적어도 내 밥을 스스로 챙겨 먹어야 한다. 물건도 내가 제자리에 두지 않으면 아무도 정리하지 않고, 청소도 온전히 내 몫이다. 하지만 출장을 가면 난 고고한 여왕이 된다. 식당이나 룸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밥상을 받아먹는다.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식사를 즐긴다. 설거지 걱정은 잊은 지 오래다. 방을 어질러두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침대 밑에 끼워둔 이불을 빼느라 씨름을 하지만 그마저 행복한 노동이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은 고사하고 출장도 사라졌다. 끝이 있는 중단이라면 참을 수 있다. 몇 개월만 지나면 다시 떠날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다른 일을 하며 기다리겠다. 문제는 일생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건 아닐지에 관한 불안감이다. 우리 사전에서 '여행'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까? 


모두가 원하는 삶이 은퇴하면 여행 가는 거라 했는데, 나 역시 버킷리스트에 은퇴 후 전 세계를 돌며 한 달씩 살아보는 것이 있는데... 후회하며 이런 생각도 해봤다. 


'아무리 바빴어도 작년에 여름 휴가를 다녀왔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는 미래를 담보로 현재에서 정신없이 살다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는 삶을 어영부영 보내고 만다.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미래를 저당 잡혔다. 작가는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나서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떠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여행의 이유》 중에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 그렇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에 온 것이다. 여행자로서 누리다 돌아가면 된다. 이제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현재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두 눈 부릅뜨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의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나를 잘 둘러보면 내 주변이 더 잘 보이겠지?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여행의 이유》 중에서


그렇다 우리는 원하던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사태로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릴 것이다. 책으로 여행을 떠나든, 내면의 여행을 떠나든, 아니 아예 여행을 몰랐던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든 말이다.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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