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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23. 2018

보통의 사랑

북리뷰 ‘내 남자’(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한 우산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둑어둑해진 가로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음은 얼굴을 올려다볼 때마다 무겁게 가라앉는데, 몸은 어깨와 어깨가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서 떠 내려온 불길한 거품 같은 것이었다. p.9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사랑이 아닐까. 관념은 칼로 자르듯 잘리지 않는다. 우리는 교집합된 경계 앞에 이르러 고민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 교집합이 세계의 전부일지 모른다. 모순과 오해가 난무하며 옳고 그름은 구분되지 않고 명징한 관념도 존재하지 않는 모호한 세계.



이른 겨울부터 파도가 겹겹이 얼어 얼음의 땅이 펼쳐지는 홋카이도 몸베스. 유빙이 부딪치고 갈라지며 천둥처럼 울리고, 하얗게 얼어가며 멀어지는 해안선에 어디까지가 뭍이고 바다인지 알 수 없어지는 북쪽 마을. 때마다 경계가 사라지는 곳에서 해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하나와 그녀의 양아버지 준고의 사랑이, 모든 것이 시작된다.


끝에서부터 15년 전을 향해 더듬어가는 소설의 여정은 사랑의 환상이 피어나던 과거를 회고하는 이별 후의 어느 날과 닮아있다. 가슴 뻐근한 통증 뒤에 찾아오는 덧없음의 미학은 터부시 되는 하나와 준고의 사랑이 보통의 사랑과 다름없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래야만 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에게 저마다의 사랑이, 저마다의 시절이 있다. 사랑이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하나와 준고처럼 모두가 ‘내 사람’의 실마리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가족에게서 채울 수 없었던 둘의 오랜 갈증은 서로를 구원자로 만드는 비극을 낳고 만다.



깊은 결핍은 언제나 뿌연 시야를 동반한다. 사소한 것에 온갖 의미가 깃들고 발톱을 세워야 할 타이밍에 맥없이 끌려가며 절박함과 비례하는 상실의 불안은 상대를 뿌리까지 옭아맨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지나치게 투영하는 행위는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 되어 ‘함께’의 가치도 ‘혼자’의 가치도 퇴색시킨다.

나의 삶은 오로지 나만이 구원할 수 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심연에 잠긴 당신에게 내미는 손의 위로가, 무너질 듯 위태로울 때 스러져 안기고 싶은 품의 위로가 구원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까. 생을 송두리째 구원하고 구원받고자 했다 한들 시절의 특권으로 남아있는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혼까지 녹아들어 그대로 한 사람이 되고 싶다던 하나의 간절함을 나는, 사랑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볼 수 없었다.

둘만의 세계에 고착된 그들의 시절을 들여다보며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을 떠올린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지은 두 사람의 세계. 한 사람이 사라지자 언어의 독방에 갇혀버린 남은 사람. 준고라는 모국어를 잃은 하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을까. 어느 날 북쪽 마을로 훌쩍 떠나 뭍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을 얼음 위를 걷고 있는 중년의 하나를 상상해 본다. 나락 같은 이 이야기가, 경계 없이 사랑하던 시절을 향한 그녀의 그리움이 적어낸 길고 긴 회상이기를 바라면서.



밤에만 남모르게 어른이 되는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어른이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준고의 딸이며 엄마이며, 피로 가득한 주머니였다. p.441


준고가 이 아이의 무언가를 계속 빼앗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태는 없지만 소중한 어떤 것. 혼 같은 것을. 빼앗기며 자라, 커다란 공동이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빼앗아, 살아남는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른이지만, 성숙하지 않고 썩어 갈 뿐이다. p.347


만약 지금 죽는다면 여기서 시간이 멈춘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지금 죽으면, 차갑고 외로운 뼈가 되어서도, 그 후에 북쪽 땅과는 거리가 먼, 한없이 먼 메마른 땅에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이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도, 다시 태어나도. 몇 번이든, 몇 번이든 나는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었다.  p.283


“그럼, 매일 뭘 하면서 지내죠?”
“...... 매일, 후회.” p.137


그리고 나는, 앞으로 누구에게서 뭘 빼앗으며 살아가면 좋을까.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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