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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Jan 05. 2019

국가부도의 날-Default,2018

삶이 아는 얼굴로 온다면


IMF로 기억되던 겨울,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대금을 받지 못한 거래처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찾아왔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으면 철문을 두드리는 우중한 소리와 현관문 한가운데에 달려있던 기계식 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며칠이고 견디던 어느 날, 문 안쪽에 붙어있던 플라스틱 덮개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쇠종을 붙잡아 벨소리를 막았다. 굵은 목소리들이 바깥에서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라며 멋대로 떠들었다. 잔금을 치를 곳이 하나 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매번 바뀌었다. 무섭고 억울했다. 나는 현관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와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벨소리에 어쩔 줄 모르던 어린애였다. 비슷한 세대를 보낸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 나에게도 97년은 충격과 불안의 시절이었다. 문 앞에 찾아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지기를 하던 목소리들은 99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완전히 끝이 났다. 나는 아직도 급작스러운 벨소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심장이 예외 없이 곤두박질친다. 택배 아저씨가 반가우면서도 곤혹스럽다. 난감한 일이다.



영화는 IMF가 낯선 세대들도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이 등장하는 씬에서도 어려운 경제용어는 자주 등장하지 않으며, 윤정학(유아인)을 잘 쫓다 보면 당시의 경제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돈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읽은 정학은 고려종금에 사직서를 던지고 투자자들을 불러 모아 유령과도 같은 어음의 폐단에 대해 열을 올려 설명하며 국가 부도에 가진 모든 것을 배팅할 것을 선언한다. 그는 손을 잡은 이들과 함께 은행과 부동산을 돌며 과감하게 ‘배팅’을 실행한다. 사실을 함구하고 IMF를 부정하는 정부의 언론 플레이에도 몇 번이고 의지를 다진다.


속지 않겠다는 정학의 다짐은 사태의 꼭지마다 구태여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강한 표현은 혹시나를 향한 간절한 첨단을 목구멍에 숨기고 있다. 반복되는 그의 "절대 안 속아"라는 외침은 믿고 싶다고 찔러오는 희망을 부러뜨리기 위한 주문이며 자기 암시처럼 보인다. 예견한 일들이 정확히 일어나 '가진 자'가 된 그는 기쁨과 절망의 아이러니 앞에서 허탈하게 웃는다.


기자들을 불러 모아 사실을 밝혀 끝까지 서민 경제를 지키고자 했던 한시현(김혜수)은 사방에 두터운 바위가 진을 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날계란의 비참을 참아내며 하릴없이 물러난다. 사직서를 쓰고 한국은행을 나서던 시현은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어렵게 찾아온 오빠와 한참을 마주 선 채 어쩌지도 못할 눈물을 흘린다. 엉엉 울 수도 없어 빨갛게 물든 그의 눈에는 97년, 파탄의 경계에 서있던 이들이 몇 번이고 느꼈을 무력함이 묻어있다.



국민들은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순진했든 알면서도 속아줬든 집단주의의 장이든 단이든 어쨌거나 국민들은 국가의 호구가 되어 대기업의 빚을 갚았다. 영화에서, 대기업과 유착해 IMF를 추진했던 재정국 차관은 20년 후 대기업을 등에 업은 투자회사의 대표가 되어 비밀스러운 회동을 지속한다. 스테인리스 공장을 지켜낸 갑수(허준호)는 따뜻했던 20년 전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윽박을 지르고, 면접을 보러 가는 아들에게 너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믿지 말라며 당부한다. 국가 부도에 배팅했던 정학은 투자회사의 대표가 되어 강연을 하고, 그를 좇는 이들에게 자신과의 식사를 돈으로 환산해 제시한다. 그들만의 리그가 새로울 것도 없으며 갑수와 정학의 냉소적인 태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의 서사이자 우리가 가진 팩트의 서사가 신의를 잃었을 때 자라는 염세를 납득시킬 만큼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20년이 지났다. 나는 서른을 훌쩍 넘긴 무늬만 어른이 되었다. 시기마다 날아오는 세금 고지서는 숨을 쉬는 데 돈이 든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려준다. 20년 전 아버지의 어깨에 소복했던 생존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돈은 생물이다. 당신과 나의 극점이 다를지 모르나 적어도, 극한의 상황에서 돈은 살아서 나를, 가족을 좀먹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과 감상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된다. 마냥의 사랑은 사랑의 가치조차 부도수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이, 연애가, 나라가, 사람과 얽혀있던 모든 관계가 알려주었다. 서른다섯의 나는 갑수처럼 세상을 믿지 않고, 이해관계의 복잡성에 머리가 아파질 때는 사고의 기승전을 삭제한 채 '결'만을 전달하는 정학과 닮아있으며, 무지의 천진함에 몸서리가 쳐지는 날마다 내 선에서의 '앎'을 이해하는 책과 사람을 골라 만나며 튀어 오르는 핏대를 달래고는 한다.



오늘의 내가 된, 오늘의 당신이 된 절망의 팩트를 내내 서술하던 영화는 말미를 장식하는 박시현을 딛고 희망으로 우회한다. 97년에는 스러지고 말았지만 그것을 '결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시현의 단호한 걸음이, 살아있는 한 다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애이며 실존의 이유이기도 한 '무화'의 표본을 제시한다. 생각하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인간은 무엇인가를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 믿음을 우리는 희망이라고도 부르고 기대라고도 부르고 의욕이라고도 부르며, 한 사람의 세계라고도 부른다. 무엇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에 따라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모양새와 질감이 달라진다. 어떤 날의 믿음은 합리화되고 아집이 되어 편협한 꼰대의 모습으로 현현하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의심해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시현의 내레이션은 안주하는 사고의 경직을 환기함과 동시에 '생의 범주는 포기하지 않는 순간까지 확장된다’는 메시지처럼도 들린다. 갑수와 정학의 체념과 냉소에 공감하며 함께 얼어붙었던 가슴이, 가차 없이 꺾였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나아가는 그녀의 결연한 걸음에 다시 뜨거워지는 것은 세 인물 중 시현만이 단정하지 않은 미래(아토포스적 타자)로 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는 생의 필연에 어깨가 늘어진다. ‘그럼 그렇지’의 모서리가 찌르는 슬픔에는 면역이 통 생기지 않는다. 포기하고 싶은 날이 잦고 당신에게 기꺼이 다가가고자 하는 날은 드물다. 나 외의 누군가와 부대껴야만 삶이라 믿는 탓에 누군가를 믿는 것에 점점 더 서툴어지는 것은 생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울음이 잦아들 때면 나는 다시 누군가를 믿고 싶어 진다. 믿게 되었을 때, 그것은 다시 스러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다시 아무도 아무것도 믿고 싶어 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지겹지도 않게 반복하다가 정말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면 삶조차 믿을 수 없게 될 테다. 그 우울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체념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손은 나를 살릴지도 모르고 다시 한번 절망의 절벽에 세워둘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이곳이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다시’의 띠 한가운데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나는 다시 도망치기도 하고, 용감한 척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 정말로 용감해지기도 하겠지. 미래가 당연한 얼굴로 온다면 그것 또한 지루한 일 아닌가 하며. 이곳의 다른 이름이 삶이라던가, 그랬던 것 같다.


글/ 이시현

사진/ 네이버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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