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부탁해
돼지 삼남매를 키우며 최대의 시련은 돼지가 오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왔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물 주기, 밥 주기로 돼(뒈) 지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EBS의 <세계테마기행> 몽골편 출연 제의가 온 것은 이때였다. 여행기를 낸 이유로 연락이 온 것 같다. 출판사 사장님을 통해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어쩌다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을까. 방송작가라는 분의 전화를 긴가민가 받았다.
“총 4부작인데요. 3주간 몽골 현지에서 촬영하고요. 돌아와서 2주간 내레이션 녹음하러 와주셔야 해요.”
‘TV 출연이라니!?’ 작가님의 말은 페이드 아웃되었고, 내 머릿속으로 부모님 얼굴이, 친지들 얼굴이 떠올랐다. 시골구석으로 간 걸 못 미더워하시는 부모님과, 무명이라도 작가라며 친지들 모일 때마다 추켜세워주는 외숙의 얼굴. 공영방송이라니.
아니, 잠깐만. 이거 프로이트 뺨치는 보이스피싱 아닐까. 이 사람, 뭘 믿고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쥐도 새도 모르는 내 여행기를 보고? 이렇게 큰 제안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말하자면 속세 생활을 좋아하는 내 마음은 전화기 너머 이 분은 방송 작가가 분명하다고 속삭였다. 작가님은 방송 콘셉트와 여행 코스를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저 몽골 잘 모르는데요.” 몽골에 한 달 여 머물긴 했지만, 방송에 나갈 수준은 아니었다.
(*몽골 여행 당시 영상 https://youtu.be/VSicLh_XDlY)
“괜찮아요. 방송 콘셉트, 촬영지, 현지 정보는 저희가 다 준비했으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방송이라는 게 역시 대충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작가님은 계획이 다 있구나. 이런 세계에 들어가게 되다니. 어머님, 아버님, 소자가 해내었습니다. 내 마음은 이미 몽골 사막에 가있었다.
“그런데... 이번 주 일요일 출국입니다.”
"네... 앗, 이번 주요?"
"좀 바트죠?"
화요일에 연락이 와서 일요일 출국이라니. 큰 그림은 있는데, 출연자만 없는 상황. 이것은 완벽한 방송을 위해 제작자가 마지막까지 찾아온 퍼즐 조각? 아니, 원래 출연자의 펑크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토록 침착하다니. 속을 뻔했어. 이것이 말로만 듣던 땜빵이구나. 땜빵이라는 비루한 현실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작가님 심정에 감정이 이입됐다. 엄마가 서로 돕고 살라고 하시지 않았나.
“암요, 작가님 꼭 휴가 내볼게요.”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때는 6월, 농번기가 한창이었다. 어떤 약속도 잡지 말자고 짝지와 결의까지 했다. 농사만 짓기로. 보리, 마늘, 감자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내기를 앞둔 논이 있었다. 때마침,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미국 조카 네로 한 달간 여행을 준비하고 계셨고, 마늘과 양파, 감자, 매실청 담그기를 내게 부탁하였다. 장독 관리마저 부탁받았는데, 완장을 수여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선비 S의 목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벼농사도 짓는데, 하필 그날, 그가 농사짓는 40마지기 논을 보여주었다. 물대기 어려운 논, 이웃이 까다로운 논. 함께 둘러보며 논물 대는 법과 주의점(논둑이 터졌는지)도 알려주었다. 젖과 꿀을 약속받는 모세의 기분이랄까. 논둑 풀 베는 일정이며 벼 수매금을 어떻게 나눌지 등에 대한 이야기, 목장 경영에 대한 이야기 등을 했다. 할 일이 생기면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모세도 십계명을 받으면서 즐거워했겠지. 40마지기라니. '40'이라는 숫자도 어쩐지 성경스럽다.
벌여놓은 일들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결정적으로 돼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매일 와서 밥을 줄 것이며, 똥을 치워줄 것인가.
전화를 끊었지만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유혹은 언제나 달다. 대타를 부탁하면 될 것 같았다. 누구에게 부탁하고, 알바를 쓰면 될 것 같았다. 마음에 '바람이 부는 순간'이었다. 출판사 사장님은 이 기회에 책도 다시 내자고 했다. 따지고 보면 사장과 직원 간의 업무 인계일 뿐이고, 이웃집 할머니의 부탁을 책임질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는 넓혀지고 있었다. 농부가 되고 싶었다. 그때 전화가 온 것이다. 내가 빠지면 농사는 물론이거니와, 회사 일도 선비 S가 떠맡아야 했다. 잠깐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좋은 기회인데 가야지. 10년 전 생각하면서 하면 돼.”
가지 말라고 했으면 반감이 생겼을 텐데, 의외의 대답에 맥이 풀렸다. 흥분이 잦아들었다. 선비 S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10년의 군생활을 그만두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귀농 5년 차, 뜻밖의 곳에서 여행의 기회가 왔다. 작가님께 연락을 드렸다. 정중히 거절의 뜻을 (다음 기회를 꼭 주십사는 부탁을 문장마다 담아) 말씀드렸다. ‘너무 그럴싸했지만 보이스피싱이야. 그녀는 지금 연변에 있어.’라고 내게도 말했다. 참 무서운 세상이야.
10년의 군생활을 그만두고 여행을 선택했던 때가 있었다. 그만둔다는 것은 충분히 두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아온 여행의 기회를 나는 거절했다. 이 사이에 미묘하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돼지와 함께한 9개월 동안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