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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Feb 26. 2020

노아 바움백의 모던 러브

우디 앨런의 <애니 홀>과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를 비교해봤다. 

*아래 글은 2020년 2월에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썼습니다. <결혼 이야기>가 생각보다 시상식에서 많이 주목을 받지 못해서 매우 아쉽네요. 그럼에도 매년 돌아올 클래식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2019)가 북미 시상식 시즌을 맞아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주목받고 있다. 혹자는 <결혼 이야기>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5)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평했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가 LA와 뉴욕을 오가는 한 커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디 앨런의 <애니 홀>(1977)과 비교하는 것이 더 유혹적이다. 두 영화의 톤은 매우 다르며 제작연도에는 무려 40년의 시차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를 보면서 우디 앨런의 <애니 홀>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통된 형식 안에서 각자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통해 40년이 사이 뉴욕 인디 감독의 계보가 어떤 식으로 이어져 왔는지, 그리고 관객이 호응하는 영화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1. '뉴욕 인디영화' 

  할리우드가 1930년대에 황금기를 맞은 뒤 스튜디오 중심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 공고해진 이래로 작가주의 감독들은 스튜디오의 간섭을 덜 받는 방식으로, 즉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 방식을 궁리해왔다. 소위 '인디(independent)'라고 불리는 이 흐름은 아직도 이어진다. 특히 서부의 할리우드의 정반대에 있는 동부의 뉴욕은 인디 영화가 꽃피운 대표 지역이다. 존 카사베츠를 선두로 시작된 뉴욕의 60년대 인디 영화는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싹튼 자신의 헤리티지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든 마틴 스콜세지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작가주의 감독들로 이어진다. 이들은 특정 장르에 한정되지 않고 할리우드 대안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 혹은 ‘뉴 할리우드 시네마’ 감독으로 명명된다. 


<애니 홀>(1977)

  뉴욕 인디영화를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우디 앨런이다. <애니 홀>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각본상을 동시에 받으며 전성기를 맞은 우디 앨런은 유대인 뉴요커의 전형을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앨런은 <맨해탄>(1979) 이후로 뉴욕의 대명사가 되었다. 화려한 뉴욕의 야경을 조지 거슈윈의 웅장한 재즈 음악과 함께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궁극의 헌사로 평가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7mwZYGcbQCo우디 앨런이 직접 연기한 <애니 홀>의 주인공 앨비 싱어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불안을 품고 살며 속물들과 자신을 구별 지으려고 애쓰는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앨비 싱어가 사랑하는 애니 홀은 독특한 패션 센스와 유머 감각을 가진 키가 큰 여성이다. <애니 홀>은 이들이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왜 연애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찾는다.  


 <프란시스 하>(2014),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에 맞춰 달리는 장면


  한편 근래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뉴욕 감독은 노아 바움백이다. 바움백은 <킥킹 앤 스크리밍>(1995)으로 데뷔하여 '멈블코어(mumblecore)' 장르의 창시 멤버에 속하는 감독이다. (멈블코어라는 단어는 앤드류 부잘스키, 조 스완버그, 노아 바움백 같은 작가 겸 감독들이 동시에 등장한 South by Southwest Film Festival에서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중얼거리는 듯한 대사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대사처럼 부자연스럽지 않고 현실의 대화 방식 같다는 인상을 준다. 다른 멈블코어 감독들과 달리 바움백은 꾸준히 뉴욕에서 찍은, 뉴요커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어왔다. 바움백의 주인공은 영화계 사람은 아니지만 무용수, 연극배우 등 창작에 대해 고민하는 예술인이다.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 인물 설정은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뉴욕에서 예술하는 사람은 전부 부자야’라며 종종 신세한탄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살 마음이 조금도 없는 완벽한 뉴요커다. <결혼 이야기>의 주인공 찰리는 극단의 감독이며 그의 부인 니콜은 연극배우이다. 니콜이 찰리에게 이혼을 제안하면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찰리가 니콜의 결정을 따라잡고 부부관계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끝난다. 또한 <결혼 이야기>에는 바움백 영화로서는 예외적으로 재즈 음악이 삽입되어 우디 앨런 영화와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다. 


2. 뉴요커 주인공  

  <결혼 이야기>와 <애니 홀>의 주인공 찰리와 앨비 싱어는 둘 다 뉴욕이라는 공간에 집착하는 예술가이다. 니콜의 말을 빌리자면, 찰리는 뉴욕에서 연극 감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한편 니콜은 고향이 LA이고, 찰리와 달리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그녀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찰리는 티는 내지 않지만 LA의 스튜디오와 영화 전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녀가 뉴욕의 극단을 떠나고 LA로 돌아가 스크린 배우 일을 이어나가겠다는 계획에 동의하지 않는다. <애니 홀>의 앨비 싱어도 마찬가지이다. 희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앨비는 애니가 가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에서 공연하던 애니를 보고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프로듀서가 LA에 와서 활동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지만 앨비는 결사반대한다. 결국 애니가 앨비를 뿌리치고 LA로 가자, 앨비는 그녀를 찾으러 가지만 마치 LA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처럼 신체적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곧바로 뉴욕으로 돌아간다. 비유적이고 과장된 성향이 강한 캐릭터 설정이 가미된 앨비보다는 덜하지만 찰리 역시 LA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모든 장소를 그의 긴 다리로 오갈 정도인 뉴욕과 달리 LA는 걸어서 어딜 가기 힘든 동네이다. 이는 찰리가 할로윈을 맞아 아들을 데리고 LA의 뿔뿔이 흩어진 주택가를 헤매며 사탕을 받으러 다니는(trick-or-treat) 시퀀스에서 다소 웃프게 묘사된다. 


3. 타협하는 주인공 

  찰리가 앨비와 다른 점은 그가 타협하기로 마음먹고 니콜과 아들이 사는 LA에도 적응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찰리와 니콜이 다시 결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찰리의 결심은 이혼 과정을 밟은 이후 그의 성장을 보여준다. 바움백의 영화에서 ‘타협’은 곧 성장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타협은 불가피하다. 바움백의 주인공은 예술인이기 전에 돈과 가족 문제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실존적 의미를 찾는 것보다는 돈 문제 해결이 급하다. 찰리가 이혼 소송을 겪으면서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맥아더 재단에서 수상한 보조금을 잃는 것이다. 그것을 잃으면 그는 경력을 이어나갈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금전적 문제가 실존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마저 잃지 않기 위해 LA에 적응하기로 타협한다. 한편 앨런의 영화에서는 타협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자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앨비는 월세가 하늘을 치솟는 맨해탄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월세나 경력단절을 고민하지 않는다. 금전적인 것을 고민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돈만 추구하는 삶을 지양하기 위한 고민이다. 두 감독의 인물 모두 부르주아에 속하지만, 앨런의 70년대 캐릭터가 조금 더 여유 있는 부르주아라면, 바움백의 21세기 주인공은 중산층 붕괴 이후의 청년세대로 대표된다. 앨런의 인물의 고민이 '어떻게 속물적인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라면, 바움백의 인물의 고민은 '얼마만큼 속물적인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갈 것인가'이다. 


4. 여자 주인공 

  결국 <애니 홀>과 <결혼 이야기> 둘 다 똑똑하고 야망 있는 여성을 통제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남자의 성장 이야기다. 두 영화 사이에 있는 4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애니 홀>과 <결혼 이야기> 모두 남성이 여성을 발판 삼아 딛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앨런의 주인공이 그 이야기를 혼잣말(monologue)로 들려준다면, 바움백의 주인공은 그 이야기를 대화(dialogue)로 들려준다. <애니 홀>은 앨비 싱어의 스탠드업 코미디식 혼잣말로 시작한다. <결혼 이야기> 또한 찰리의 독백으로 시작하지만 바로 니콜의 독백이 뒤따른다. 사실 찰리의 독백은 이혼 과정에서 부부가 서로 쓰기를 권장받은 편지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찰리가 이혼이라는 니콜의 결심을 뒤늦게 따라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후반부는 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니콜의 회신에 잇따르는 초반부는 니콜에게 할애된다. 즉, 영화의 절반은 니콜의 것이다. 한편 감독의 스탠드업 코미디 배경 때문인지 모놀로그는 <애니 홀>에서 되풀이된다. 모놀로그는 내레이션이 되고 급기야 앨비가 제4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호소하듯이 말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그가 사랑에 대한 혜안을 얻는 것도 그의 외로움을 부각하는 모놀로그로 전달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M3Q2zhGd4)


<애니 홀>의 마지막 장면. 유명한 '달걀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앨비에 비해 그의 성장의 계기가 된 애니는 끝까지 조용하다. 그녀는 영화의 제목이 될 만큼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녀가 앨비와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는 그의 모놀로그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알 수 없다. 특이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속은 알 수 없는, 그래서 남성 주인공에게 상처를 주는 여성 캐릭터의 클리셰를 '드림 픽시 걸(dream pixie girl)'이라고 부른다. (드림 픽시 걸에 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본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 볼 수 있다.) <애니 홀>의 애니는 드림 픽시 걸의 원형이다. 한편 <결혼 이야기>의 커플은 끝까지 대칭을 이룬다. 두 사람의 이혼이 법원으로 갔을 때의 숏/역 앵글숏(shot-reverse shot)이 그러하며 이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 니콜의 노래를 뒤따르는 찰리가 노래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초반에 찰리가 감독이고 니콜이 그의 코멘트를 따르는 배우였다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만의 TV 시리즈를 감독하게 된 니콜이 찰리의 풀린 신발 끈을 묶어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앞길을 걱정해줄 수 있는 상태에 다다라서야 갈라선다. 


<결혼 이야기>의 법정 장면. 숏/역앵글숏


5. '뉴 뉴 아메리칸 시네마'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2020년에 더욱 뚜렷이 보이는 이유는 노아 바움백이 부상한 시기 때문이다. 2017년 시상식 시즌에 할리우드의 미투(#MeToo) 운동으로 인해 주요 남성 영화인들이 미국 영화계에서 배제됐다. 불명예스러운 리스트에는 우디 앨런도 있었다. 1992년 그의 부인 배우 미아 패로우가 우디 앨런이 딸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그를 고소했지만 우디 앨런은 끝까지 죄를 부인했다. 2017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딸 딜런 패로우의 호소문이 신빙성을 얻으며 그의 경력이 끝내 하락세를 맞았다. 그 이후 영화계에서는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대거 빠지면서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인디계의 젊은 감독들이 대거 부상했다. 노아 바움백이 <결혼 이야기>로 주목받는 것 또한 이 움직임의 일환이다. <결혼 이야기>의 제작사 넷플릭스가 시상식과 가까운 시기에 영화를 개봉했다는 사실에서 뉴미디어 스튜디오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안으로, 노아 바움백을 할리우드 감독의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넷플릭스의 의도를 다분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는 이런 내막과 무관하게 뛰어난 영화이다. 바움백은 자신의 재능과 20년간 쌓아온 기술을 이 영화에서 꽃 피웠고, 더할 나위 없는 시기에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았다. <결혼 이야기>는 한때 시상식을 주름 쥔 <애니 홀>의 수정 및 발전된 버전으로서 영화계가 새로운 길을 향하고 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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