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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Sep 26. 2020

프랑스 영화의 이데올로기: 칸과 자비에 돌란을 중심으로

<마티아스와 막심> 개봉을 맞이하여. 

1. 들어가며

        시상식 시즌이 도래하면서 영화 커뮤니티에서 작품뿐만 아니라 영화제와 시상식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이 지지하는 작품이 남들에게도 인정받기를, 특히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인정받기를 은연중에 원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영화제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품상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서도 해외 영화제에 관한 관심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봉준호 감독 이전에도 해외에서 인정받은 국내 영화감독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예시를 몇 가지만 들자면 전도연 배우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으로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은 적이 있고, 김민희 배우도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았다. 여기서 발견되는 특징은 대체로 배우들이 수상을 많이 했고, 북미 영화제가 아닌 유럽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는 것이다. 배우나 음악, 미술보다 감독이나 작품이 상을 받는 경우를 보통 더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념이다. 그리고 유럽 영화제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는 칸 영화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봉준호 감독이 이번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에 국민이 더욱 호응한 것이다. 왜 국내 영화 소비자들, 그러니까 영화 산업과 직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해외 영화제에서 국내 영화가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는가? 왜 이탈리아의 베니스 영화제와 로카르노 영화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영화제,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 등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갖고 프랑스의 칸 영화제에 집착하는가? 칸 영화제는 무엇을 주장하는 영화제이고 칸 영화제 수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자비에 돌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 10년간 칸 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자비에 돌란을 빼놓고 답할 수 없다. ‘칸의 신동’이라는 별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 자비에 돌란은 칸 영화제에서 발굴된 이후부터 프랑스 영화계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유로 자비에 돌란은 프랑스 영화감독이라는 오해를 종종 받는다. 이는 드문 실수가 아니며 우연은 더더욱 아니다. 이 현상은 칸 영화제 시상의 정치적 함의, 더 넓게는 현재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는 위치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가 들이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소 제국주의적인 의식까지 엿볼 수 있는 프랑스 영화계와 칸 영화제의 성향은 <기생충>을 기점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유럽과 북미 영화계의 관심을 사기 시작한 한국의 입장에서 필히 고려해야할 문제이며, 나아가 영화제의 속성을 파헤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2. 칸 영화제와 프랑스 영화

  2.1. 칸 영화제와 유럽 영화제

        영화제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영화제는 아니다. 대체로 북미에서 열리는 영화제가 상업적인 성격이 강하고 유럽 영화제가 ‘예술적’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그 또한 개최국에 따라 다르다. <환상의 빛>(1995)로 데뷔하여 25년째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온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감독 생활의 경험을 담은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베를린,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를 비교하고 있다. 고레에다에 따르면 유럽 영화제의 표준은 아무래도 칸 영화제다. 1932년 프랑스 교육 장관이 설립한 칸 영화제는 지금까지도 비평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유럽 영화가 몰리는 장이다. 다음으로 큰 것이 독일 베를린 국제 영화제로, 1951년 시작해서 매년 2월에 개최된다. 사회파 작품이 많이 모이는 경향이 있고,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다큐멘터리 작품이 수상하는 경우도 있다. 2019년에는 이스라엘 군인이 프랑스로 이민하는 과정을 그린 <시노님스>이 황금곰상을 받았다. 세 번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데뷔작이 출품된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영화제다. 1932년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영화제로 매년 8월 말부터 9월 초에 개최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데뷔작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출품되었기 때문에 칸 영화제에 몇 번이나 초청됐음에도 불구하고 ‘베니스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고 덧붙인다. 그는 베니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사실 베니스는 교통도 불편하고 또 오랫동안 ‘상업’보다 ‘예술’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탓에 바이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중략) 세계적으로는 칸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지요. 이런 현상은 개최국 영화 산업의 융성과 쇠퇴에도 상당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영화작가들은 작품을 완성하면 가장 사업 기회가 많은 칸을 노리는 것이 상식이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베니스의 경쟁 부문보다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un certain regard)이 더 좋다’는 사고방식이 주류입니다.

        그러니까 각 영화제가 주장하고자하는 바가 있고, 선호하는 유형의 영화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영화제 시상은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뉴미디어와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 이래로 영화계의 변화가 감지되자 영화제의 의사표현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2017년 칸에서는 넷플릭스로 동시 공개되는 영화는 출품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반면,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작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더 킹> 프리미어 상영을 진행하고 같은 해 DC 코믹스 원작 <조커>에 최우수상을 쥐어줬다. 즉 같은 ‘예술적’인 영화를 선호하는 영화제라 할지라도 칸 영화제는 가장 권위적이고, 가장 상업적이면서도 가장 보수적이다. 여기서 보수적이란, 사회정치적 의미의 보수가 아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이 확실히 있고 그것을 지키고자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2.2. 누벨바그와 프랑스 영화 

        그렇다면 칸 영화제가 보수하고자 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아직도 의견이 분분히 갈리는 주제이긴 하지만 프랑스는 영화가 시작된 나라이다. 영상물을 만든 것은 에디슨이 먼저였지만 영화의 계보의 첫머리에는 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가 있다.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로 관객에게 유료로 영상물을 상영했고, 조르주 멜리에스는 최초의 극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이로써 영화의 정의는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moving picture)이 아니라 관객의 흥미를 염두를 두고 만든 영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영화 역사에 있어 관객과 그들의 경험은 영화 자체 못지않게 중요하다. 칸 영화제의 넷플릭스에 대한 조치 또한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영화 관객은 1950년대 시작된 프랑스 영화의 움직임 ‘누벨바그’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성태에 따르면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로 이어지는 시기는 사실상 삶의 질, 그 자체가 달라지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영화는 이들에게 전세대들과는 다르게, 아주 중요한 생활의 하나가 되었고 자신들을 표현하는 도구로 이해되었다. 이 이상한 관객들은 곧 씨네필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획득한다. 영화는 발견되는 대상이 되어, 어떤 영화를 선택하는가, 어떤 영화에 의미를 둘 것인가가 고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토론과 연구를 통해 해부되는 대상이 되었고, 영화에 대해 말을 하는 자리는 지식의 장이 되었다. 이때 출간되기 시작한 잡지 중 하나가 프랑스와 트뤼포, 에릭 로메르, 장 뤽 고다르,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숱한 비평가 출신 감독들을 내보낸 <카이에 뒤 시네마>다. 영화가 지적 산물인 것과, 그것을 보고 판단하는 문제도 단순한 감상을 넘어서서 비평의 문제와 만난다고 하는 사실은 영화의 지위를 격상시켜주었다. 따라서 씨네필, 나아가 누벨바그의 출현이 언제나 영화의 지위와 맺고 있는 관련을 고려하고 있어야만 한다.

        즉 프랑스 누벨바그는 비평이 영화를 선재하는 전복을 이뤘다. 따라서 칸 영화제는 영화의 가치를 논하는 장소로서 자신이 갖는 권위의 기원이 되는 프랑스 누벨바그에 대한 선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이 고전 할리우드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선호하듯(대표적으로 <라라랜드>(2016)), 칸 영화제 또한 누벨바그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누벨바그의 스테레오타입을 몇 가지 짚는다면 어린이 혹은 청년이 등장하고, 자유와 사랑에 관해 논한다는 것이다. 당시 생겨난 ‘작가’ 개념, 즉 카메라는 감독에게 작가의 펜과 같기 때문에 무조건 연출하는 사람이 카메라를 직접 들고 촬영해야 한다는 개념 덕분에 고안된 ‘핸드 헬드’ 기법 또한 누벨바그의 이미지적인 특징이다. 덧붙여 프랑스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혹은 잘 인정하지 않으려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등장인물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주로 백인이라는 점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뒤 영어가 공용화 된 이후로 프랑스는 프랑스어 보존을 위해 사회문화적으로 애써왔다. 한편 2010년대 테러와 난민 문제로 프랑스가 보수화되면서 백인 선호 또한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3. 자비에 돌란 

3.1. 칸 영화제 수상 경력으로 보는 자비에 돌란의 감독 커리어 

        캐나다 퀘벡 출신 자비에 돌란은 2009년 19살이라는 나이에 연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를 칸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즉 처음으로 상영하면서 프랑스 영화계에 등장했다. 당시 근 몇 년간 돌란처럼 에너지 넘치는 젊은 감독이 부재했던 프랑스 영화계에서는 그를 환영했다. 80년대에 등장하여 <퐁뇌프의 연인>(1991), <나쁜 피>(1986),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등 파리가 배경인 연인 이야기를 많이 만든 레오 까락스나 90년대에 등장한 까이에 뒤 시네마 평론가 출신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한때 신인들이 원숙한 감독으로 성장한 뒤로 프랑스 영화계에는 떠오르는 젊은 감독이 없어 오랜 침체기를 맞았다. 따라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야망 넘치는 자비에 돌란은 이들이 필히 영입하고 싶어 했던 인재였다. 실제로 <아이 킬드 마이 마더> 이후 돌란은 칸 영화제에서 거의 모든 작품을 프리미어 상영했고, 거의 매번 수상에 성공했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와 차기작 <하트비트>(2010)는 ‘젊은 시선 상’을 받았고 <로렌스 애니웨이>(2012)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 이후로 돌란은 칸 영화제의 ‘어린 왕자’, ‘신동’, ‘enfant terrible’*등 반은 그를 천재로 치켜세우고 반은 그를 비꼬는 뉘앙스의 말로 불리었다. 

*  직역하면 무서운/엄청난 아이. 조숙한 아이나 남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을 뜻한다.


제 67회 칸영화제 그랑프리 공동수상자 83세 장 뤽 고다르(의 대리 수상자 프로듀서 알랭 사르드)와 25세 자비에 돌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말대로 영화제는 자신이 발견한 작가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칸의 경우 신인감독상을 받은 감독의 차기작을 두 팔 벌려 계속 맞이하는 경향이 있다. 자비에 돌란은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칸 영화제를 통해서 전 세계 영화계의 시선을 주목받았기 때문에 늘 칸 영화제의 편향성 논란을 달고 다니는 감독이었지만, 2014년 25살 ‘풋내기’ 자비에 돌란이 <마미>로 심사위원상을 83세 ‘거장’ 장 뤽 고다르 감독과 함께 공동수상한 뒤로 이 논란은 거세졌다. 2016년 레아 세이두, 뱅상 캐슬, 마리옹 코티아르 등 프랑스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지만 프리미어 직후부터 혹평이 쏟아진 <단지 세상의 끝>에게 그랑프리가 쥐어지자, 그에 대한 칸 영화제의 편향은 모든 영화인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018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한 뒤로 반응이 좋지 않았던 <존 F. 도노반의 삶과 죽음> 또한 프랑스에서는 캐나다에서보다 6개월이나 더 빨리 개봉했다. 

        이 논란에는 <마미>나 <단지 세상의 끝>이 과대평가 됐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 선택 기저에 있는 칸 영화제의 의식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프랑스 영화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감독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누벨바그 움직임의 선구자이자 살아있는 전설 장 뤽 고다르와 함께 캐나다 퀘벡 출신 자비에 돌란에게 심사위원상을 수여한다는 것은 칸 영화제가 돌란을 프랑스 영화의 계보로 끌어들이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자비에 돌란이 데뷔한 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 또한 30대에 접어들었고 장편 연출작이 8편에 다다랐다. 그중 대부분을 고향 퀘벡에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칸에서 촉망받은 신예였고 한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프랑스어로 찍었기 때문에 프랑스 감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돌란은 늘 퀘벡의 지역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영화를 찍어왔다. 예를 들어 같은 프랑스어더라도 퀘벡의 프랑스어는 본토의 프랑스어와 발음 차이가 확실히 나기도 하고, 미국과 인접하기 때문에 영어 단어도 많이 섞어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 영화제에서 자비에 돌란을 프랑스 영화의 계보로 이끌려는 이유는 첫째, 그의 영화 스타일이 프랑스 누벨바그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고, 둘째, 퀘벡이라는 공간이 프랑스인들에게 갖는 의미 때문이다. 


3.2. 자비에 돌란의 작품의 프랑스적’ 어필

        자비에 돌란은 8편의 장편과 함께 뮤직 비디오도 많이 연출한 바 있다. 뮤직 비디오 연출 의뢰가 들어올 만큼 자비에 돌란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감각적 조합을 이뤄내는 데 능하다. 특히 <하트비트>에서는 대화하는 장면보다 배경음악이 상황을 대신 설명해주는 듯한 장면의 비중이 더욱 많다. 또 세 주인공의 삼각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트비트>는 프랑스와 트뤼포의 <쥘앤 짐>(1962)과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1964)을 연상시킨다. 자비에 돌란이 어떤 음악을 선정하는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영화보다 영어가 더 지배적으로 쓰이는 팝음악의 영역에서까지 자비에 돌란은 불어로 된 음악을 선정한다. <하트비트>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2003-2004) 시리즈에서 쓰인 ‘Bang Bang (My Baby Shot Me Down)의 불어 버전을 쓰는 대담한 선택을 하여 원곡에 완전히 새로운 맥락을 씌웠다. <마미>에서는 퀘벡 가수 셀린 디온의 덜 유명한 불어 노래 ‘On Ne Change Pas’가 중요한 순간에 쓰이기도 했다.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면도 많지만 음악이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는 대사가 아주 많은 편에 속한다. 부엌에서 싸우는 장면이 없으면 자비에 돌란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등장인물이 말싸움을 엄청나게 한다. 대화가 많기 때문에 프랑스어의 사용 또한 돋보이고 중요하다. 영어 발음이나 영어 단어를 섞어 쓰면 그 인물은 어린 편에 속하고,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혐오하는 태도를 보이면 이전세대에 속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AAZiDgPxA&ab_channel=%D0%92%D0%B0%D1%81%D0%B8%D0%BB%D0%B8%D0%B9%D0%9A%D0%BE%D0%BD%D0%B0%D0%B4

<마미> 셀린 디온의 On Ne Change Pas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와 심사위원상을 받은 <마미>에서는 언제든지 폭발할 듯한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성정체성이 이전 세대의 대표이자 자신과 반대되는 젠더의 엄마와 충돌하는 국면을 묘사한다. 자비에 돌란의 주인공은 모두 게이이지만 퀴어 영화 스테레오타입과 달리 외부 세상과 심각하게 갈등하지 않는다. 외부세상은 자비에 돌란의 퀴어 인물에게 미국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처럼 노골적으로 증오를 표하지 않는다. 돌란의 세상은 으레 현대 사회가 그러하듯 은근한 시선으로 퀴어를 경멸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폐쇄된 사회가 외부의 사회보다 더 안전했다면 자비에 돌란의 영화 안에서는 사회가 폐쇄되면 폐쇄될수록 외부의 사회보다 덜 안전하다. <탐 앳더 팜>(2013)에서는 산업화된 도시와 폐쇄된 시골의 대조를 통해 이를 보여주고, 최근작 <마티아스와 막심>(2019)에서는 이성애자 남성 집단이라는 폐쇄된 구조 안에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이 폐쇄성에 대한 비판은 퀘벡이라는 지역의 비판으로 해석된다. 

        퀘벡은 1534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명령을 받는 자크 카르티에가 퀘벡의 가스페 반도에 우연히 상륙하여 그 지역을 프랑스 왕령으로 선포하면서 ‘누벨프랑스’로 불리는 프랑스령이 됐다. 하지만 1764년 프랑스가 7년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함으로써 ‘파리조약’에 의해 퀘벡을 영국에 양도하게 된다. 이후 1867년까지 퀘벡은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퀘벡의 프랑스인들에게 동화정책을 펼쳤고, 캐나다 연방이 출범한 이후에도 캐나다가 영국계 주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을 고집했다. 민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2등 시민으로 전락한 프랑스계 퀘벡인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이 60년대 ‘조용한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 특징으로는 복지국가 원칙의 채택, 가톨릭 교회와 시민사회의 분리, 전통적인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퀘벡인의 새로운 정체성 정립 등이다. 특히 1977년 8월 26일 ‘프랑스어 헌장’이라 불리는 101호법을 공포한 뒤로 퀘벡의 프랑스어 사용과 교육이 강화되었다. 이 혁명은 퀘벡의 정체성 확립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보수화에도 기여했다. 인접해있는 영어권 시민과 소통이 어려워 일자리를 찾는 것을 어려워하는 모습은 <마티아스와 막심>에도 잘 묘사되고 있다. 이는 퀘벡의 프랑스어가 현대에 차지하는 위치를 폭로하고 있다. 퀘벡에서 불어는 교양이나 지식의 상징이 아닌, 여전히 영어 한마디 못하는 무능한 2등 시민의 상징일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UAA6HeNopY&ab_channel=mike

<마티아스와 막심> 불어를 쓰는 몬트리올 출신 마티아스가 영어가 제1언어인 토론토 출신의 사람과 만나는 장면. 언어 사용에서 이들의 위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되, 지역이 규정하는 인물의 정체성보다 개인의 성정체성이나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는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20세기 퀘벡의 흐름을 거스른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정체성보다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비에 돌란 영화의 경향 때문에 프랑스 영화계로의 편입이 더욱 편리했던 것 아닐까? 이것에 답하기 위해 다른 감독의 사례를 들어보자. 사실 프랑스 누벨바그같은 프랑스 영화 전성기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은 유럽보다 미국에 더 많이 존재한다. 특히 쿠엔틴 타란티노의 경우 수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누벨바그 감독, 특히 장 뤽 고다르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고 강조했다. <펄프픽션>(1994)의 유명한 춤 장면은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펄프픽션>은 말 그대로 ‘별 것 아닌 것(pulp)’에 관한 ‘극(fiction)’으로, <국외자들>의 주인공처럼 프로페셔널 배우도, 댄서도 아닌 이들의 나날을 담은 영화로서 누벨바그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타란티노는 이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이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이미 <저수지의 개들>(1992)로 선댄스에서 발굴된 바 있는 감독이기도 하고, 너무나도 미국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영화이기 때문에 프랑스 영화계로 편입될 수 없었다. 불어가 아닌 영어를 쓰는 것을 넘어서, 미국의 도로와 식당, 그리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흑인 하위문화가 타란티노의 영화를 지역성이 짙은 영화로 만든다. 


4. 결론

        작년 말 자비에 돌란은 프랑스 문화 장관으로부터 프랑스어 문화와 영화에 쏟은 노력을 기리는 의미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이는 자비에 돌란 뿐만 아니라 셀린 디온, 드니 빌뇌브 등 다양한 퀘벡 예술가들에게 수여된바 있는데, 현재 프랑스와 퀘벡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퀘벡은 한때 ‘누벨 프랑스’였으나 프랑스가 영국에게 빼앗긴 지역으로, 제국주의 시절의 ‘소유’의 개념은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지속적으로 ‘편입’과 ‘융합’의 시도를 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프랑스의 보수적인 민족성 보수 정책은 자비에 돌란 영화에서 나타나는 ‘탈민족’ 정체성과 정확히 상충되는 점이다. 칸 영화제에서 받은 스포트라이트 덕분에 자비에 돌란은 지금까지 성장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세상의 끝>이 여타 해외 미디어의 합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았기 때문에 비판은 더 거세졌고, 그 여파로 인해 한동안 작품 활동이 어려워졌다. 휴식기 이후 다시 고향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소박하게 찍은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으로 돌아온 현시점에서 감독 자비에 돌란을 프랑스 영화 밖의 맥락에서 논의하는 작업이 더욱 중요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이지수, 바다출판사, 2017. 

김성태, <프랑스 누벨 바그>, <<세계영화사 강의 -초기 영화에서 아시아 뉴 웨이브까지->>,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0.

퀘벡학연구모임, <<키워드로 풀어보는 퀘벡 이야기>>, 아모르문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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