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번햄 넷플릭스 스페셜 <인사이드 Inside>(2021)
* 아래 글은 문학 플랫폼 던전에 2021년 6월 28일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https://www.d5nz5n.com/work/82
좋아하는 이에게 감정을 고백하는 것이 어렵듯, 가장 아끼는 예술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자주 포기하게 된다. 내 마음은 이만큼이나 큰데 글 솜씨는 안 따라주고, 내 마음은 늘 예술의 폭발적인 에너지보다 가난하다. 이것이 내가 지난 6년간 보 번햄에 관해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한 이유다.
번햄의 첫 번째 작품을 본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 2013년 공개된 번햄의 첫 번째 넷플릭스 스페셜 스탠드업 쇼 <what. 뭐.>는 유튜브에도 동시 공개되었고, 여전히 번햄의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이유는 번햄 본인이 말했듯, 그의 커리어가 유튜브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픽셀이 다 보이는 화질의 영상 속 열대여섯 살의 보 번햄은 주로 키보드나 기타를 갖고 빠른 페이스의 재치 있으면서도 더러운 농담이 섞인 웃긴 노래를 불렀다. 이런 영상들이 소위 대박을 치면서 번햄은 유명세를 탔고, 유튜버라고 명명하기도 무색하게도 빠르게 주류 코미디 세계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의 다른 유튜브 영상을 보면 미국/영국 드라마 <오피스>의 영향을 받은 등 별 다를 것 없는 10대 백인 남성의 유머 감각을 소유했다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번햄 특유의 카리스마나 위트에서 그는 ‘타고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요약하자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린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방년 22살의 나이에 넷플릭스 단독 쇼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런 그의 ‘천재성’은 이미 많은 이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해왔으며, 심지어 나 또한 몇 년 전 대학생 잡지에 쪼그만한 글 토막에 어설프게나마 묘사했던 부분이다. 이번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천재성보다는 그의 응시력이다. 통찰력 또한 많은 위대한 시인들이 가진 힘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해온 ‘시인들’의 작품에서 내가 감탄하게 되는 부분은 통찰력 위에 있는, 아니 통찰력을 지탱하는 응시력이다. 상반되는 수많은 요소들을 연결하면서도, 한쪽으로 수렴하게 되는 유혹을 떨치고 대조, 분열, 긴장을 그대로 보고 보여준다.
그렇다면 번햄의 대조, 분열, 긴장은 어디서 오는가? 번햄의 첫 넷플릭스 쇼 <뭐.>에서는 그의 자아에서 분열이 발견된다. 쇼의 초반부터 제2 캐릭터로 등장하는 내레이션의 조롱적 대사라든지, 중간에 등장하는 노래 ‘Left Brain Right Brain 좌뇌 우뇌’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찾을 수 있다. 이 분열로 조성된 긴장은 마지막 노래 ‘We Think We Know You 우리는 널 안다고 생각하지’에서 폭발한다. 어린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한 그의 주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던지는 말들에 괴로워하던 번햄이 자신의 예술에 집중하면서 주변 목소리를 잠재우고 도취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첫째, 이 쇼에서 번햄은 마임을 많이 했다는 것, 둘째, 마지막 노래에서 일렉트로닉 기타를 치는 듯한 마임, 소위 ‘에어기타’를 친다는 것이다. ‘코미디’에서 ‘퍼포먼스’라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코미디적 역할을 하던 마임이라는 요소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과감함이랄까 카리스마에 반했던 것 같다. 아니, 카리스마를 넘어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당당함, 너무도 불안정한 감정을 날 것의 상태로 수면 위에 끌어올리는 능력에 감탄했다.
내가 응시력이라고 부르는 이 힘, 이 능력을 번햄이 쓸 때면 늘 감탄사가 나오면서도 동시에 위태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번햄은 말 그대로 뭔가를 끌어올리는 퍼포먼스를 마지막으로 쇼를 폭파시키면서 끝내는 경향이 있어서 늘 탈진, 소진의 인상을 주곤 한다. 번햄의 두 번째 쇼 <Make Happy 행복하기>(2016)에서는 그의 공연하고자 하는 자아와 공연하기를 요구하는 외부세계가 충돌한다. 물론 여느 인간과 다름없이 번햄의 첫 번째 공연에서도 외부세계와 갈등하는 그의 욕망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뭐.> 중 ‘Sad 슬프다’에서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안-웃긴지 unfunny, 그러기에 그 안에서 농담이나 따먹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소시오패스 같은지 자조하는 내용이 주가 된다. 하지만 <뭐.>에서 이 긴장이 마지막 퍼포먼스로 인해 해소가 되는 반면, <행복하기>의 마지막 퍼포먼스도 폭발적 에너지가 있긴 하지만 관객의 긴장을 해소시켜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번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소비와 생산의 기형적 조합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공연’, 퍼포먼스 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무심히 던지는 말과 달리 이에 대해서는 번햄 또한 별 달리 손쓸 바가 없다. 더 최악인 것은 번햄과 우리 모두 여전히 공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자면 번햄은 이 공연하고자 하는 욕구를 저주로 여기는 듯하다. 특히 현재 미국에 사는 백인 남성으로서 감히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다는, 심지어 농담이나 따먹으며 발언권을 남용하는 사치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는 공연하고 싶고, 공연해야만 한다.
<행복하기>에서 해소되지 않은 대조, 분열, 긴장은 가장 최근에 나온 코미디 스페셜 <인사이드 Inside>에서 계속된다. 코로나19로 인한 2020년 미국 락다운을 기점으로 번햄 혼자 집에서 작업하기 시작한 이 스페셜은 모든 방면에서의 그의 성장을 보여준다. 이전 스탠드업 쇼에서도 1분 1초 단위로 칼같이 사운드 및 조명 디렉션을 하기도 했고, 2018년 크리스 록의 스탠드업 쇼 <탬버린 Tamborine>의 감독을 맡고, 같은 해 하반기에 개봉한 <에이스 그레이드 Eighth Grade>는 연출과 시나리오를 담당했다. <인사이드>에서는 화면 연출뿐만 아니라 음악도 훨씬 풍성해진 것을 나처럼 음악에 관해서 문외한인 사람도 눈치챌 수 있다. 예전에는 간단한 멜로디에 펀치라인을 늘어뜨린 것에 비해, 이번에는 80년대 신스 사운드에 집중하여 일관성이 생겼고 보컬 컨트롤도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테크닉의 완성도가 만큼이나 그의 고민 또한 2020년 6월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사회문제를 배경으로 깊어진다. <행복하기>에서 해소되지 않은 긴장은 그의 공연하고 싶은 마음과 공연하기를 명령하는 사회에 불복종하려는 마음에 의해 형성된다. <인사이드>에서는 그와 같은 백인 헤테로 남성이 공연해서는 안 되는 사회를 배경으로 공연이 필요한,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의 고뇌를 보여준다. “[...] apathy’s a tragedy and boredom is a crime 무감각은 비극이자 따분함은 범죄”, “[...] you say the whole world is ending; honey, it already did 너는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고 말하지. 자기야, 세상은 이미 끝났어”, “[...] oh shit, you’re really joking at a time like this 씨발, 너는 이 시국에 농담이 나오냐” 등은 그가 공연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세상을 스케치한다.
번햄은 <행복하기>에서도 그랬듯, 공연해야 살 수 있는 이 삶의 조건을 계속해서 일종의 저주(개인적 저주가 아닌 세대 공통적 저주)로 보고 있으며 방에 혼자 갇혀 관객 앞에서 공연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자신을 보며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관객을 앞에 두고 있다는 환상, 혹은 망상에서 시작하여 무아지경, 혹은 광기로 향해가는 노래 ‘All Eyes On Me 다 나를 쳐다봐’에서는 그의 외로움이 폭발한다. 하지만 바로 뒤에 따르는 노래 ‘Goodbye 안녕’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 well, well, look who’s inside again/ went out to look for a reason to hide again/ well, well, buddy you found it/ now come out with your hands up, we’ve got you surrounded 쯧쯧, 또다시 안에 틀어박혀 있는 니 꼴을 좀 봐라/ 숨기 위한 변명을 찾으러 나서더니 결국 찾았네/ 이제 손들고 나와, 너는 포위되었으니.” 번햄은 자신을 헐벗기고 끝까지 스스로 벌한다.
미국에서는 백신이 꽤 풀리기 시작하면서 락다운이 잦아들 즈음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인사이드>의 막바지에서는 번햄 또한 마침내 집 밖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밖에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닌, 공연하기를 명령하는 사회가 건재히 기다린다. 안에 갇혀있을 때에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의 웃음과 스포트라이트가 이제는 피할 수 없이 쏟아지는 총알 다발처럼 번햄을 공격한다. 이전에 이야기했던 아녜스 바르다의 경우와 비슷하게, 보 번햄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남들이 다 느끼고 남들에게도 중요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도 끝내 자신에게 특수한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축소하지 않고 항상 쇼의 가장 드라마틱한 지점에 자리를 내준다.
<인사이드>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빔 프로젝터로 감상하며 슬슬 웃는 번햄의 얼굴이다. 이 묘한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번햄의 커리어 초반부터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 분열, 대조, 긴장은 <인사이드>에서 최고조로 달하며 해소되기를 (해소시켜주기를) 거부한다. 가능한 해석은 (종종 그렇듯)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의 계속되는 자조다. 그래, 이 시국에 농담을 하려 하다니 너는 끝까지 벌을 받아야 싸. 하지만 나는 이 해석이 너무 슬프고 비극적이라서 다른 해석을 믿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비극에 진정히 웃을 줄 아는 코미디언의 모습이다. 그런 웃음에서 새로운 스페셜을 기획할 힘이 나온 것 아닐까.
<행복하기> 공연 중 관객 한 명이 잠깐 생긴 정적 속에 뭐라 소리친다. 여기에 번햄은 이렇게 답한다. “I’m trying to immortalize something that I’ve worked on for a long time. Shut up! 저는 지금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작업해온 거를 역사에 길이 남기려고 하거든요, 제발 닥치세요!” 번햄이 사회문제를 노래하며 겉으로는 밥 딜런 행세를 하는 반면 속셈은 이기적인 놈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박힌 예술가라면 이런 이중성을 갖춘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껏 예술가를 둘러싼 담론이 이런 다층적 단면을 ‘천재적 예술가’, ‘자선적 예술가’ 등의 타이틀로 감추려 했던 것이다. 그러는 편이 훨씬 쉽고 슬프지 않으니까. 생각해보니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번햄의 미소를 두 번째 해석으로 단정 짓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이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해피엔딩을 찾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추신
<뭐.>(2013)은 여기서 감상 가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c5zic4q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