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셋 몸의 <면도날>을 읽고, 빙 리우의 <화해의 조건>을 보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이야기가 수신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를 향해 흘러간다는 전제를 두고 영상을 감상하는 편이다. 그런데 화해의 조건은 좀 달랐다. 기록을 매개로 연출자인 빙 리우 본인의 손에도 잡히지 않는 목적 모를 항해를 하는 느낌이었다.
목적은 처음부터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닥친 선택을 하다 보면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보이고, 그럼 그게 목적이 된다. 면도날에 등장한 캐릭터들을 보면 그렇다. 소설 초반에 이사벨은 래리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래리를 기다리기로 하지만, 이내 체념하고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이사벨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니 행복하다고 한다. 사랑하는 래리와 함께할 수 없는 삶이었음에도 이사벨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 순간부터 이사벨의 목적은 물질적 풍요로움인 것으로 윤곽이 잡혔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사벨이 래리를 선택했다면 그건 래리의 세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서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선택을 하고 나면 목적이 생긴다고 쓰고 보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인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한다면, 그 선택에서 삶의 가지가 뻗어져야 하는 사람이다. 선택에 앞서 목적을 설정했다가 막상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피곤할 것 같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의 반대에 놓여있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나를 괴롭히는 일이다. 음…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주제 파악이 빨리 되면 쉽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행복한 삶은 B와 D 사이의 주제 파악이다. ^_^! 그렇다고 나에게 거창한 목표가 없거나 내가 냉철한 것은 아니다. (면도날과 화해의 조건에서 보여주듯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
아무튼, 면도날의 인물들처럼 빙 리우도 다큐멘터리 제작을 통해 원하는 걸 얻었기를 바란다. 나는 성공담을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