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넷맘 Jan 30. 2021

하루아침에 고양이 집사가 되어버렸다.

반려동물은 장난감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발단은 찰리였다. 이웃인 에멀리가 웰링턴으로 긴 휴가를 떠나게 되자 그녀는 내게 고양이 찰리를 부탁했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형적인 개러버였다. 어렸을 때부터 개를 좋아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아주 잠시였지만 조그마한 강아지를 키웠던 기억이 있다. 강아지 이름은 시우였다. 시우는 태어나자마자 우리 집으로 보내진 탓에 엄마가 보고 싶어 매일 밤마다 낑낑 소리를 내며 울었는데, 어린 나는 매일 밤 시우 곁에서 그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리다 함께 잠들고는 했다.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파트에서 개를 키울 수 없다며 강아지를 키우는 것을 완강히 반대한 아빠 때문에 시우는 시골에 사는 먼 친척 집으로 보내졌다. 이후 나는 시우가 그리운 나머지 안면도 없었던 먼 친척의 집으로 전화해 강아지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를 졸라 그 집까지 무작정 찾아간 적도 있다.      




이리 와. 쫑.

시우는 그사이 쫑이 되어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우를 보기 위해 개집으로 달려간 나를 데면데면하더니 새로운 주인인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꼬리를 흔들기 바빴다. 그런 시우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지. 그날의 실망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억을 제외하고는 시우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애틋한 마음뿐이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할까, 어린 마음에도 죄책감이 가장 많이 남았던 기억이 있다. 그 감정은 마치 쓰다 버린 장난감처럼 시우를 버렸다는 미안함이었다.     




그러나 고양이에 대한 기억은 달랐다. 고양이는 그저 친근하지 않은 동물이었고 오히려 두렵기까지 한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 두려움을 갖게 된 트라우마가 있다. 외국에서 한 달간 홈스테이를 했을 때 포동포동 살찐 고양이 한 마리와 살게 되었는데 (꼭 가제트에 나오는 마피아 고양이를 닮았다),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무서워 피해 다닌 기억이 있다. 그러다 마지막 날, 그 고양이와 막다른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가 옆으로 피해 가는 나의 다리를 사정없이 할퀴어 버렸다. 찰나의 순간 고양이의 섬뜩한 표정을 보았다. 그때부터 고양이를 볼 때면 그 고양이의 표독한 얼굴이 떠올랐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

고양이에 대한 감정이 변화된 건 한 권의 소설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고양이에 대한 매력에 매료당한 기분이 들었다. 특유의 도도함이라고나 할까. 고양이에게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 안에서 얽매이지 않는 특유의 고고함이 느껴졌다. 소설 속에는 개와 고양이의 생각 차이를 극명하게 서술한 부분이 나온다. 바로 동물의 시선에서 서술한 인간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 고양이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 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것은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던 동물에 대한 진부한 관점이 인간 위주의 사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주인이고 동물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삶은 언제든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장난감을 버리듯 시우를 쉽게 포기해버린 그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에멀리의 고양이 찰리는 전형적인 개냥이었다. 개처럼 사람을 잘 따랐고, 자신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다. 그를 쓰다듬을 때면 찰리는 그르렁 소리를 내며 자신을 더 쓰다듬으라는 듯 거만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래. 바로 여기야. 여기.


찰리는 몸을 이리저리 비비며 머리를 곳곳이 세웠다. 특히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면 그는 부르릉 전신을 떨며 그르렁 소리를 더욱 거세게 내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이 되어 그의 격한 애정표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적절한 대응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찰리가 싫지 않았다. 고양이와의 교감이 이런 거구나,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정이 꿈틀댔다. 매일 아침 아이들과 찰리의 먹이를 챙겨주고 찰리와 놀아주는 것은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하루 중 꼭 있어야 하는 일부분이 된 것 같이 느껴졌다. 찰리를 보내고 나니 헛헛함이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아기 고양이를 우리 집 마당에서 발견한 건 마치 우연 같은 일이었다. 앞마당에는 나무로 된 데크가 깔려있는데 어느 날 그 안의 작은 홈에 반짝이는 두 눈이 보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고양이었다. 배가 고픈 모양인지 힘이 없어 보였다. 냉장고에 있던 닭고기를 찢어주니 혀로 핥으며 게걸스럽게 먹어재꼈다. 그러나 겁이 나는지 잠시 먹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기 고양이는 매일 우리 집 마당을 찾아왔다. 주인을 잃은 고양이일까, 아님 길고양이일까.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아이들은 이 고양이를 키우자며 잔뜩 흥분한 채로 콧구멍을 씰룩거렸다. 주인이 있는 고양이를 내 맘대로 집에 들일 수는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집에 찾아온 고양이가 굶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었다. 고양이 사료와 먹이통, 물통을 준비했다. 아이들과 커다란 박스를 쓱쓱 잘라 고양이가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었다.     




퐁이.

막둥이 시호가 퐁이라는 이름을 아기 고양이에게 지어주었다. 아이들은 매일 퐁이가 오기를 기다렸고 퐁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두려워했던 퐁이도 마음을 열었다. 고양이 장난감으로 놀거나 아이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몸을 이리저리 부비기도 했다. 그러나 퐁이가 이웃집에서 새로 들인 아기 고양이, 크리스탈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뉴질랜드의 집 고양이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속 고양이처럼 남의 집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지낸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실망했다. 남의 고양이 말고, 우리 고양이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하지만,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먹이고, 씻기고, 치우고.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처럼 수많은 희생과 책임이 따라야 하는 과정이기에,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찰리와 퐁이를 가까이하며 언젠가 고양이나 강아지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사실 나도 했었다. 지금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여건이 되었을 때 그때는 버려진 동물을 입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에 의해 파양 되거나 유기되어 무분별하게 안락사되는 동물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능하다면 아픔을 가진 동물의 상처를 덜어주고 싶다. SNS에 올리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반려동물을 마치 장난감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가족으로서 그의 아픔을 안아주고 싶다.  



   

귀여운 퐁이가 큰애의 호응에 맞춰 점프를 한다. 요즘은 제법 둘 사이에 끈끈한 케미스트리가 흘러넘친다. 퐁이는 우리 집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낸다. 저녁에 주인집에서 퐁이를 찾으러 올 정도다. 반려동물을 가까이하며 아이들의 행동도 많이 변화했다. 퐁이가 오면 차례를 정해 퐁이 밥을 챙겨주거나, 푹푹 제멋대로 찌르던 손짓은 없어지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퐁이를 쓰다듬는다. 처음 가졌던 동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관심은 천천히 따뜻함과 책임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하루하루 깨닫고 있다. 동물은 장난감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걸.      






* 찰리의 사진


* 아이들과 만들어준 퐁이의 집: 퐁이가 심심하지 않게 아이들이 아끼는 장난감을 곁에 두었다.


* 퐁이를 바라보는 삼둥이


*처음에는 구멍 속에서 나오지 않았던 퐁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많았던 퐁이 (삼둥이 응원 댄스 보세요^^)


* 이제는 제법 큰애와 친해진 퐁이






매거진의 이전글 뉴질랜드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