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청년 수명이와 승민이, 두 청년의 우정과 도전을 그린 이야기다. 수명이가 주인공이자 화자다.
수명은 어릴 때부터 몹시 소극적이고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말을 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동네에, 학교에,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아침에 말을 걸면 저녁에야 대꾸를 들을 수 있다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나는 지독한 말더듬이였다. 당황하면 말더듬증에 횡설수설이 겹쳤다. 다급해지면 비명이 말을 대신했다.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좋아하던 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후 세상을 무서워하며 폐쇄적이 된다. 어느 날부터 '그놈 목소리(환청)'에 시달린다.
내 방에 있고 싶었다. 아버지도 무서웠지만 바깥은 더 무서웠다. 책방만 나서면 놈이 등을 떠밀었다. 달리는 차 앞으로, 한남대교 난간으로, 지하철 선로로, 학교 옥상으로. 나는 남의 집 담벼락 밑에 숨었다. 건물 화장실에 숨었다. 공원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 이로 인해 파출소에 들르는 일이 왕왕 생겨났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마귀 형상을 하고 나를 데리러 왔다.
수명은 아버지를 미워한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잘 지내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수명은 생각한다.
아버지한테 전화라도 드리고 싶었다. 평소 악담을 실현하셨으니 좋아서 미치고 계시겠어요. 그렇더라도 우리, 같은 병원에서 만나지는 말자고요. 어쩌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정녕 나를 버리시나요.
세상이 무서운 수명이는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삶에 익숙해져 간다. 세상에서의 삶을 조금씩 포기한다.
복도 바닥을 내려다보며 터벅터벅 걷노라면 기이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불쑥불쑥 목젖을 치받던 삶에 대한 분노도, 아버지를 향한 원망도 견딜 만한 서글픔으로 느껴졌다. 미래에 대한 절망이나 운명에 대한 두려움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걷다가 흡연실에 들러 담배 한 대 물면, 낙관이 강아지처럼 기어들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인생이 별건가. 이래저래 살다 가는 거지.
동갑내기 승민은 수명과 완전히 반대다. 정신병원에 갇혀 시력을 잃어가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내려 치열하게 몸부린 친다.
나는 하릴없이 보고 들었다. 승민이 윗도리를 벗어 내던지는 것을. 한쪽 팔을 벌리고 맨가슴을 열어 보이며 포효하는 소리를.
“와, 다 와. 날 죽여보라고, 자식들아!”
등줄기로 전율이 치달았다. 이해에서 온 전율이었다. 직감이 불러온 전율이었다. 승민은 보호사나 진압 2인조에게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소설은 수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승민이, 승민으로 인한 수명이의 변화를 타고 흐른다. 어느 날 승민은 수명이에게 묻는다.
승민은 철망에 이마를 대며 물었다.
“넌 누구냐?”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잘 놀고 있다가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아서서 문짝에 등을 기댔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징표’에 대해 물은 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 울컥했던 나머지 소리를 질러버렸다.
“없어, 없어. 어쩌라고?”
정신병원을 퇴원하면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우울한 세탁부'도 세상을 멀리하려는 수명이 안타깝다. 삶에 직면할 수 있도록 아픈 곳을 찌른다(여기서 '미스 리 선생'은 수명이다).
“나, 미스 리 선생님 좋아해. 정말로. 주제넘은 말이지만 선생님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참 이상스러웠어. 이런 사람이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사나. 그래서 원주에 시험 치러 갈 때 최기훈 선생한테 물어봤어. 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무식한 놈 소견으로 그러고 말았지. 자꾸 병원에서 도망쳐서 아버지가 이 산골짝에 가둔 거구나. 내가 거꾸로 생각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어.”
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수명은 갈등한다. 삶에 대한 포기와 아픈 직면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수명)“최근 들어 자주 꿈을 꿨어. 한 번씩 꿀 때마다 그날 밤에 성큼 접근해 있었고. 난 두려웠어.”
(승민)“꿈꾸는 게?”
(수명)“아니. 내가 벼랑에 발끝으로 버티고 서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인정하면 선택해야 할 테니까. 발을 떼 버리거나, 그날 밤을 끌어내서 진실과 대면하거나.”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나는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는...
나는 더 견딜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다못해 고함이라도 질러야 했다.
“비켜!”
왜 하필 ‘비켜’ 였던가. 모르겠다. 그 순간 내 몸을 꿰뚫었던 것이 무언지만 안다. 통쾌함이었다. 해방감이었다. 깨달음이었다. 내 심장도 승민처럼 살아 있었다. 흉곽 속에서 아프게 요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심장이었다. 보트 한 대가 왼편을 스쳐갔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일어섰다. 앞 유리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 안에서 들끓는 것들을 토해냈다. 추격자들을 향해, 드넓은 호수를 향해, 수리 희망병원 501호를 향해, 내가 더나온 세상을 향해.
“비켜. 다 비켜!”
정신병원 탈출을 결심한 승민은 수명에게 선물을 하나 준다. 평소 하고 싶었던 말도 전한다.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앗기지 마.”
승민의 눈이 고글 속에서 웃고 있었다.
“네 시간은 네 거야.”
승민이 떠난 자리에서 수명은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목과 가슴 사이에선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
수명이는 일어서려 노력한다.
공주 감호소에 수감되던 날, 나는 비명 없이 삭발을 견뎌냈다. 최초로 내 안의 야수를 통제하던 순간이었다. 내 자신에 대해 희망을 갖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마침내 수명이는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한다. 탈출이 아닌 심사를 통과한 정식 퇴원. 하지만 병원 밖은 두렵다.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시다. 돌아가셨다.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한다. 무섭다.
몸속 어딘가에서 마개 하나가 뽑혔다. 그곳으로 체온이 ‘쏴’ 하고 빠져나갔다. 식어가는 가슴 밑에선 새들이 파닥거렸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새였다.
마음속에서 승민이가 나타나 질문한다. '넌 누구니?'
수명은 질주하며 대답한다.《내 심장을 쏴라》의 마지막 문장이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저자는 수명이와 승민이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을까.
세상은 두려운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피하지 말고 맞서라는 격려, 두려운 세상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맞서라는 충고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진짜 인생은 내 가슴으로, 내 힘으로 상대해 보겠다는 결심이 시작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내내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수명이는 과거 그렇게 무서워했던 세상으로 돌아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실 걱정이 된다. 따라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하지만 더 크게 드는 마음은 응원이다. '수명아, 잘해라. 지금 가진 결심을 꽉 붙들어!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인생을 한 번 제대로 상대하는 놈이 되겠다는 결심!'
멋진 소설이다. 조용히 시작해서 점점 커진다. '아버지는 밥을 먹고 나는 욕을 먹었다', '나는 발등을 내려다봤다. 뚝 떨어져 내린 간이 거기서 팔딱대고 있었다'같은 작가 특유의 표현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자 정유정은 간호사였다. 정신병원 실습 시기에 환자들을 보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이 시작됐다.
표지를 넘기면 첫 장에 이 문구가 등장한다.
'분투하는 청춘들에게 바친다.'
분투하는 모든 이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나는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며 맞짱 뜨는 용기를 내보면 좋겠다. 승민이의 말처럼 '우리 시간은 우리 것'으로 만들고 채워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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