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식주의자 Sep 05. 2021

수세미를 선물 받았다

 결혼 전, 시가 식구들과 함께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시가의 모든 구성원은 천주교 교인인데, 마침 우리가 간 카페가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목재로 꾸민 카페는 아늑했고, 카페만큼이나 편안한 인상의 수녀님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반가우셨는지, 우리도 교인이라고 수녀님에게 알은체를 했다. 무교인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고, 대화가 조금 더 길어지며 남편과 내가 곧 결혼할 사이라는 사실도 전해졌다. 그러자 수녀님은 나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뭔가를 가지러 가셨다. 대화는 내내 시부모님과 나누었는데, 선물은 제일 구석에 존재감 없이 앉아있던 나에게 주고 싶다고 하셔서 약간 불안했다. 첫눈에 반한 게 아닌 이상, 왜 하필 나에게…?    


  곧 수녀님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수세미였다. 알록달록한 수제 수세미. 수세미를 내 손에 꼭 쥐어주시며 수녀님은 수줍게 한마디 덧붙이셨다. "설거지 잘 하시라고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닌 나를 콕 집어 수세미를 전한 이유는, 곧 설거지를 맡게 될 사람이 당연히 나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에 악의는 전혀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수세미를 전하던 따뜻한 손의 온기, 종교인들이 공유했을 강한 유대감은 선의를 의심하고 싶지 않게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의가 너무나 순수한 것이라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런 유의 선의는 아무도 탓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온화한 모습으로 다정한 말을 건네지만, 결과적으로 고통을 준다면 잔혹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요컨대 ‘다정한 학대’다. (중략) 내가 생각하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은 상대를 배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움을 준다. 자신의 온화함과 다정함을 통째로 던지기만 한다고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어릴 적 그리던 아버지가 되어』, p28 


이 책의 저자는 죽음을 앞둔 암 환자이다. 암 선고를 받은 소식을 알리자, 주변에서 암에 좋다는 것들을 권하는 연락이 쇄도했다. 대부분 ‘암을 낫게 하는 항아리’나, ‘기적의 물’ 같은 영적 요법이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대체 의학 같은 것이었다. 모두 온화한 모습을 한 다정한 선의였지만 나중엔 그것이 고통스럽게까지 느껴졌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마음에 비할 도리가 있겠냐만은, 그가 말한 '다정한 학대'의 뜻이 무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온화함과 다정함을 던지기만 한다고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상처 준 일들을 생각해본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꼬아서 받아들이네’라며 스스로를 방어할 뿐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에는 게을렀던 태도를. 내가 건넨 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였던 간에 의도가 얼마나 선했건 간에, 무책임하게 던져진 다정함은 상대의 손에 쥐어졌을 땐 알록달록 예쁘기만 한 수세미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상상을 해보라'고 말한다. 짐작하지 않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가 처한 상황을, 그가 겪어온 역사를, 그의 마음을.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온화함이나 다정함 보다도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무서울 만큼 현실적인 성격 탓에 줄곧 상상은 헛되고 실용적이지 않다고 느끼지만, 나는 내가 그런 방면으로는 과하게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그나저나 그날 받은 수세미는 어디로 갔을까?  


작가의 이전글 '연애'라는 이어달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