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인생이 망할 것 같다는 불안함이 찾아올 때가 있다. 퇴사 후 오롯이 사업에 매달리며 불안이 찾아오는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불안은 금방 사라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단단히 자리를 틀고앉아 쉬이 사라지지 않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프리랜서와 사업자들이 이런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각자 불안을 물리칠 수 있는 노하우 하나씩은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불안하지 않나?! 그럴리는 없다. 이 불안함이 나만 느끼는 감정이라면 너무 억울하다!
불안할 때 나는 조용히 앱 하나를 깐다. 운세를 점치는 앱이다. 이 앱을 깐다는 것은 마음이 또 불안해졌다는 뜻이다. 올해만 몇 번은 지웠다가 다시 깔았다. 이 앱에서는 사주와 타로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점술을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주로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 운세가 좋으면 안도하며 그날 하루는 운명에 마음껏 나를 맡기고, 운세가 안 좋으면 함께 나오는 조언을 마음에 새긴다. 처음엔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보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루틴이 되어버렸다. 가끔 다섯 줄도 채 안 되는 운세 풀이에서 가끔 말도 안 되게 위로가 되는 말을 만날 때도 있다. 이를 테면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듯 행운이 오기 전이 가장 힘든 것입니다’, ‘당신은 천천히 나아가고 있으며, 당신이 탄 배는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같은 문장들이다. 평소에 읽었으면 진부함에 몸서리를 쳤을 테지만,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땐 이런 표현들이 마음에 콕콕 박히는 법이다. 이래서 점에 빠지고 굿에 빠져서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있구나,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는 친구에게 내가 요즘 얼마나 불안한지 이런 것까지 본다고 하니, 친구가 “야, 나는 어떤 줄 아냐?” 하면서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친구의 핸드폰에는 심지어 운세 앱만 따로 묶어 놓은 폴더가 있었다. ‘야, 너두?’라는 눈빛을 교환하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웃음의 끝맛은 조금 씁쓸했다. 야, 너두 되게 힘들구나.
30대 중반에 들어서며 바뀐 점이 있다면 깊은 고민을 친구들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불안함을 해소했다. 상대가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해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고민을 털어놓는 행위 자체로 마음이 한결 나아졌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인생의 홀쭉한 허리 구간 정도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는 또, 다시 출발선 앞에 서게 되었다. 누구는 가정을 이루고, 누구는 직장에서 더 높은 위치로 발돋움하고, 누구는 직장 밖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며 저마다 인생 후반전을 향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삶의 모양이 달라진 만큼이나 고민의 모양도 달라졌다. 그러니 공감의 교집합이나 서로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두가 정신 없이 달려야 할 시기에 굳이 나의 불안의 무게까지 얹고 싶진 않다. 이제는 혼자서도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운세 앱을 맹신하게 되었다....)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럴 때 인간은 두 손을 모으게 마련이다.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잡고 싶을 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김하나 p37
정말 그렇다. 힘이 들 때 나는 운세 앱을 켜기도 하지만, 기도를 하기도 한다. 종교가 없는데도 결국에는 두 손을 모으고야 마는 것이다.『파이 이야기』의 파이처럼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가끔은 아빠에게 기도를 한다. 그럴 땐 인간이란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 실감하곤 한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바벨탑을 쌓다가도 극한의 순간에는 하릴없이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는.
운세 앱에 로그인하면 광고 팝업창이 우수수 뜬다. 대부분은 우울증 상담이나 심리 상담에 관한 것이다. 마음이 힘들어 운명에라도 기대고 싶을 때 이 앱을 켜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감히 또 짐작해본다. 마음의 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말을 삼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은 두 손을 모으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