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식주의자 Sep 17. 2021

확실한 사랑을 느끼는 순간

나는 역시 이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는 거야, 스미레는 그렇게 확신했다. 틀림없다(얼음은 언제나 차갑고, 장미는 언제나 붉다). 그리고 이 사랑은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강한 흐름에서 몸을 빼내는 건 이젠 어려울 것 같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스미레의 사랑은 확실하다. 얼음이 차가운 것처럼, 장미가 붉은 것처럼 자명한 사실이다. 문장이 마음에 들어 페이지 귀퉁이를 접으며 ‘이렇게 사랑을 확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봤다. 사랑에 빠졌을 때 자신의 감정은 단연코 사랑이라고 매 순간 확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 그런 ‘확실한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아주 드물게 찾아온다. 이를 테면, 이런 순간이다.  


 어느 겨울이었다. 집 근처에 오마카세 소요리집이 새로 생겼다. 주변 허름한 가게들에 대비되는 모던한 외관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는데, 내부 분위기는 더 멋스러웠다. 넓지 않은 공간에는 바(bar) 좌석밖에 없어서 모두가 나란히 앉아야 했는데, 옆사람과 맞닿을 것 같은 간격의 아슬아슬함과, 눈이 침침할 정도로 낮은 조도 같은 것들이 은밀한 느낌을 자아냈다. 곧 #mood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서 유명해질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유명해지기 전에 꼭 남자친구와 가봐야지, 마음에 담아두었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이미 입소문이 났는지 매번 예약에 실패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 마침 8시에 취소된 자리가 났다는 인스타그램 알림이 떴다. 8시라..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일단 예약을 걸었다. 아싸 성공!!


  기분이 들뜰 때 나는 극성스러워진다. 남자친구에게 늦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저녁을 최대한 맛있게 먹기 위해 아침 식사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정말 극성이다. 식사에 곁들일 와인을 한 병 들고 남자친구를 만나 8시가 되자마자 가게로 들어섰다. 장시간 공복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여유롭게 음식을 즐겨야 하는 식당의 분위기에도, 와인에도 어울리지 않는 허기였다. 코스 음식을 나오는 족족 게걸스럽게 비워냈고 나의 기세에 주인도 남자친구도 당황한 눈치였다. 식사 속도에 맞춰 와인 한 병도 금세 비웠다. 나에게 와인 반 병은 굉장한 과음이지만 그날은 어쩐지 모든 것이 오버페이스였다.

 어쨌든 음식은 맛있었고 분위기도 예상했던 대로 마음에 들어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머리가 띵-했다. 쓰러질 것 같았다. 한 발만 더 걸으면 쓰러진다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취한 건가?’ 머리가 핑그르르 돌며 몸이 기우뚱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때 표고버섯이 생각났다.

 언니가 신신당부한 표고버섯 말이다. 다음날 시골 엄마 집에 모여 가족끼리 가리비 삼합을 먹기로 했는데, 먼저 도착한 사람 중 누구도 표고버섯을 챙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표고버섯은 가리비 삼합의 감초이거늘! 시골에서 마트에 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해서, 아직 서울에 있는 내가 표고버섯을 사가야만 했다. 사야만 한다.... 모두가 삼합을 기대하고 있단 말이다...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끌고 근처 하모니마트로 향했다. 남자친구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와인 한 병에 취한 여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멀쩡한 척했지만 누가 봐도 갈지(之) 자 걸음으로 표고버섯 매대 앞에 당도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가장 많이 들어있으면서 가장 저렴한 표고버섯 한 팩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영원처럼 아득한 저 멀리서 누군가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ㅇㅝ ㄴㅇ ㅏ~~~~"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점점 절박해졌다. 나는 눈을 떴다. 아니, 내가 눈을 언제 감았단 말인가? 눈앞에 이건 웬 표고버섯들이란 말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표고버섯 더미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아득하게 들려오던 그 소리는 멀쩡히 밥만 잘 먹던 내가 병든 닭처럼 픽-하고 쓰러지자, 기겁한 남자친구가 하모니마트가 떠나갈 듯 외쳐대던 내 이름이었다. 남자친구는 나를 붙잡고 부서져라 흔들어댔다. 그리고 나는 그 애처롭고 절박한 몸짓에서 뜬금없이... 사랑을 느꼈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릿속은 하얘져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게 전해지는 이 감정은 사랑이구나. 하지만 그 확실한 사랑을 충분히 실감할 새도 없이, 하모니마트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시선이 느껴져 얼른 그 자리를 피해야 했다. 남자친구는 나를 둘러업고, 한 손엔 표고버섯을 들고 힙스터들로 가득한 토요일 저녁 망원동 한복판을 질주했다. '질주'라고 하기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서 그 혼미한 정신에도 나는 그의 귀에 대고 "부끄러우니까 좀 내려줘"라고 말했다. 그도 순순히 나를 내려줬다.  


 결국 원인은 급체로 밝혀졌다. 소란스럽게 속을 게워냈더니 언제 그 난리를 피웠냐는 듯 말짱해졌다. ‘어쩐지 급하게 먹는다 했다’며 혀를 차는 남자친구의 비아냥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좀 전에 느낀 그 오묘한 감정을 떠올렸다. 강렬하고 확실한 사랑의 감정을. 지금은 그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었는데 나는 우리가 싸우고 말을 안 하거나 익숙함이 지루함으로 느껴질 때, '진짜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 맞아?' 하는 의심이 들 때마다 하모니마트의 기억을 복기한다. 얼음은 언제나 차갑고, 장미는 언제나 붉고, 그것은 사랑이었다. 애달프고 원초적이며 눈물 나게 고마운, 사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무신론자의 기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